한국 남자 싱글 최초로 세계선수권 메달 따내
지난해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5위로 마치고 차준환이 했던 말이다. 그 말은 예언이 됐다. 차준환이 25일 ISU(국제빙상경기연맹)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남자 싱글 은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올랐다. 올림픽 다음으로 권위 있는 이 대회에서 최초로 메달을 따낸 한국 남자 선수가 됐다.
차준환이 25일 일본 사이타마 수퍼 아레나에서 열린 2023 ISU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은메달을 획득한 뒤 태극기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 남자 선수 최초의 이 대회 입상이다. /대한빙상경기연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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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이해인(17)이 여자 싱글 2위에 올라 김연아(32) 이후 10년 만에 세계선수권 입상에 성공한 데 이어, 차준환(21)까지 동반 은메달을 획득해 한국 피겨의 새 역사를 썼다. 김연아는 2007~2013년 금·은·동메달을 각각 2개씩 따냈고, 이후로 작년까지는 남자 차준환 10위(2021년), 여자 유영(18) 5위(2022년)가 이 대회 한국 최고 성적이었다.
차준환은 이번 대회에서 쇼트프로그램(99.64점)과 프리스케이팅(196.39점), 총점(296.03점) 모두 개인 최고점을 작성했다. “경기에 만족했기 때문에 점수를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행복했다”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드디어 오늘 보여줬다”고 소감을 밝혔다.
세계선수권 2연패를 달성한 일본 우노 쇼마(25·301.14점)는 쇼트와 프리에서 고난도 4회전 점프를 총 7회 시도했다. 동메달을 딴 미국 일리아 말리닌(18·288.44점)은 초고난도 쿼드러플 악셀(공중 4바퀴 반 회전)을 포함해 4회전 점프를 총 8번 시도했으나 실수가 잦았다. 반면 차준환은 쇼트에서 한 번, 프리에서 두 번만 4회전 점프를 뛰었다. 횟수는 경쟁자들에 비해 많지 않았으나, 완성도가 높아 가산점을 챙겼다.
아역 배우로 활동했던 차준환은 음악을 표현하고 관중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표현력 등을 평가하는 구성 점수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다. 올 시즌엔 특히 캐릭터가 돋보이는 프로그램을 짰다. 쇼트에선 ‘빌리 진’ 등 마이클 잭슨 모음곡을 배경으로 경쾌하게 문워크 동작을 선보여 관중을 열광시켰다. 프리에선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배경 음악에 맞춰 제임스 본드로 변신했다.
차준환이 25일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프리스케이팅 경기에서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 배경음악에 맞춰 연기를 펼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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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이클 잭슨이 어린 시절 활동했던 ‘잭슨 파이브’ 음악까지 찾아 듣고, 1960년대 007 시리즈 초창기 영화부터 꼼꼼히 살피며 연기력을 다졌다고 한다. ISU 홈페이지는 “쇼트 3위에 오른 차준환은 (프리 결과에 따라) 한국 남자 최초 메달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연기한 제임스 본드만큼이나 차분하고 침착했다”고 전했다.
차준환은 올 시즌까지 국내 선수권 대회를 7연패했다. 국내에는 적수가 없으나, 그만큼 외로운 길을 걸어야 했다. 과거 김연아를 가르쳤던 브라이언 오서(61) 코치와 중학교 때부터 캐나다에서 훈련하면서 주니어 그랑프리 연속 우승,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동메달 등 한국 남자 피겨 역사를 써나갔다. 캐나다 생활을 돌아보며 “정말 스케이트 말고는 한 게 없다. 10대 시절이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부상에 시달리기도 했고, 발에 맞지 않는 부츠 문제로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의 올림픽을 치르면서 부쩍 성장했다. 2018년 평창에 남자 싱글 최연소 선수로 나서 15위를 했고, 4년 뒤 베이징에서 순위를 5위로 끌어올렸다. 김연아 이후 한국 피겨 올림픽 최고 성적이었다. 4대륙선수권에선 2019년 6위에서 2020년 5위, 2022년 우승으로 차근차근 발전했다. 세계선수권에선 2019년 19위, 2021년 10위에 이어 이번 대회 2위로 도약했다. 올림픽을 거치면서 감을 잡았다는 그는 “음악적 요소와 구성에 더욱 신경 쓰면서, 차츰차츰 기술을 업그레이드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고난도 점프 경쟁에 휩쓸리기보다 자신만의 속도와 강점, 스타일을 지키겠다는 다짐이었다.
남자 피겨 정상을 오랫동안 다퉈온 하뉴 유즈루(28·일본)는 지난해 선수 생활에서 은퇴했고,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네이선 첸(23·미국)은 올 시즌 학업에 전념하면서 이번 대회에 불참했다. 새로운 경쟁 구도가 형성되는 시기에 20대 초반 차준환의 전성기가 열리고 있다. 이번 대회는 정상권을 독점했던 러시아 선수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출전 금지를 당하면서 일본이 남자 싱글과 여자 싱글(사카모토 가오리), 페어(미우라 리쿠-기하라 류이치 조) 우승을 휩쓸었다. 미국 매디슨 초크-에번 베이츠 조가 아이스댄스 금메달을 가져갔다.
[최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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