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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매경GOLF 김기정 편집장이 만난 사람] 인생 후반 9홀을 시작한 박세리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은 1년 반 동안의 슬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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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계 ‘살아 있는 전설’ 박세리는 대한민국 여자골프의 선구자이자 세계 여자골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선수다. 2016년 은퇴 후에도 그는 여자골프 국가대표 감독을 거쳐 사업가, 방송인, 유튜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골프 경기로 치면 전반 9홀을 마치고 후반 9홀을 돌고 있는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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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가 주말골퍼가 됐다는 얘기가 들렸다. 나는 끝나지 않았는데 끝난 것처럼 얘기하더라. 하지만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박세리는 골프 선수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1년 반 동안의 슬럼프’를 꼽았다.

그는 “살면서 나쁜 일도 있지만 그 결과 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런 경험이 살아가는 데 더 힘이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세리는 2016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에서 은퇴했다. 그해 브라질 리우 올림픽에서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박인비의 금메달을 이끌었다. 지금은 구독자 38만 명을 보유하고 있는 유튜브 채널 ‘세리 TV’를 운영중이며, 사업체인 바즈인터내셔널의 대표, 박세리 희망재단 이사장, 방송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인생 2막을 시작했다. 골프 경기로 치면 전반 9홀을 마치고 후반 9홀의 첫 홀을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인터뷰에 앞서 호칭 정리가 먼저 필요했다. 박세리는 ‘감독’이 가장 애착이 가는 호칭이라고 했다. 박 감독과의 인터뷰는 청담동의 울프강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박 감독과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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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라는 이름은 ‘세상을 빛내리’라는 의미로 지은 한글 이름이라고 들었다. 이름처럼 골프로 세상을 빛냈다. 골프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초등학교 6학년 때 골프를 쳤던 아버지를 따라 연습장에 함께 갔다. 아버지가 골프채를 주면서 쳐보라고 했지만 처음에는 골프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이후 주니어 골프대회에 갤러리로 참관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마음이 바뀌었다. 골프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골프 선수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순간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처음엔 골프가 싫었다. 이후 골프를 시작하고 골프에 재미를 붙일 때 아버지 사업이 잘 안됐다. 부모는 자녀가 좋아하는 것을 무리해서라도 해주려고 하지 않나. 지원이 어렵다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집 상황이 좋지 않은 걸 보게 됐다. 그때 결심했다. 성공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는 극적이었다. 꼭 성공하겠다고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어떤 교훈을 얻었나. 괜한 욕심 때문에 우승도 많이 놓쳤다. 한 번에 성공하는 삶은 없다. 노력하면서 조금씩 발전하는 거다. 뭐든 경험이 중요하다. 물론 모든 경험이 좋은 경험일 수는 없고, 누구도 나쁜 경험을 원치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 나쁜 경험은 없다. 나쁜 경험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된다.

왜 슬럼프가 찾아왔을까.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두면 나태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은퇴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여유를 갖는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되게 답답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수 때는 내가 누구보다 완벽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슬럼프가 오고 나서야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슬럼프에 빠지면 어떻게 되나. 어떻게든 빨리 슬럼프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같은 골프장에서 같은 클럽으로 같은 사람이 치는데 결과가 너무 달랐다. 신기했다. 나태했다면 억울 하지나 않았을 거다. 사실 슬럼프에 대비해서 더 많이 연습했었다. 그래서 처음엔 슬럼프를 부정했다. 잠시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연습량을 늘렸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악화했고 결국에는 부상까지 오게 됐다. ‘박세리가 주말골퍼가 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끝나지 않았는데 끝난 것처럼 얘기하더라. ‘포기’라는 단어가 싫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두려움밖에는 안 남았다.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워지고 ‘괜찮다’는 소리도 괜찮다고 안 들렸다. 대인기피가 생기고 혼자 있고 싶어졌다.

어떻게 슬펌프를 극복했나. 처음 미국 갔을때부터 가족처럼 지내는 두 커플이 있다. 낚시를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 아무것도 못잡았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생각이들며 마음이 심란했다. 그날따라 파도도 안치고 물이 잔잔했다. 한참을 바라봤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시간을 뒤돌아보게 되더라. 나름 현명하고 똑똑하고 관리 잘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많이 부족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생각하는 게 달라졌다. 자신을 내려놓게 됐다. 한번도 스스로 ‘잘했다’라고 안 했다. 약해지는 게 싫어서 계속 스스로 채찍질만 했다. 그러니 번아웃(burnout)이 온 거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아지고, 또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거라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랬더니 실제 나아지더라. 우승을 통해 재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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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리 감독과의 인터뷰를 진행한 청담동의 울프강 스테이크하우스에서 박 감독의 ‘밴 플리트상 수상’을 기념하는 디저트를 내놓았다. 박 감독은 지난 10월 한국과 미국의 유대 강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밴 플리트상을 수상했다. 한국 여성이 이 상을 받은 것은 박 감독이 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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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투어 무대에서 활동하며 즐거웠던 때도 많았을 것 같은데. 운동선수로서 즐거웠던 순간이 없었다. 물론 우승하면 좋다. 하지만 기쁨은 짧았다. 30분 안에 인터뷰하고 짐싸서 다음 경기를 위해 나갔다. LPGA와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목표를 달성한 게 운동선수로서 최고의 성과다.

대화해보니 생각이 무척 깊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무래도 골프라는 종목이 그렇다. 혼자 스스로 많은 것을 결정해야 한다. 장시간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다. 미국에 혼자 처음 갔을 때 유명 선수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 스스로 어떤 사람이 돼야 할지를 많이 생각했다. 그래서 더 생각이 많아진 것 같다.

골프 선수로 은퇴 후 가장 큰 삶의 변화는. 유튜브, 방송활동도 활발하다. 특히 현대백화점과 더현대서울에서 진행한 <팝업상륙작전>은 큰 인기를 끌었다. 방송을 통해 보이는 모습이 반전이라고 하더라. 선수로 골프를 칠 때는 집중하다 보니 얼굴에 웃음이 없었다. 강하고 차가운 인상만 기억한다.

TV나 유튜브에선 자연스럽게 웃고 말하는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 편하다. 하지만 여전히 방송도 어렵다. 여러 분야의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건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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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에는 골프를 잘 안 친다고 들었다. 아직도 내려놓지 못해서 그렇다. 골프를 즐길 만도 한데 실수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대신 동네 주민들이나 지인들과 집 근처에서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한다. 음식과 어울리는 반주를 하는 것도 좋다.

얼마 전 인터뷰에서 자기 삶을 골프 경기에 비유했을 때 전반을 마친 것 같다고 했더라. 선수 은퇴한 지 8년 차다. 전반 홀 끝나고 10번 홀스타트하는 느낌이다. 전반 9홀은 운동선수로서 목표도 꿈도 이뤘다.성공한 운동선수로 살았다. 후반전은 제2의 인생이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 처음엔 ‘세리 키즈’란 말도 부담스러웠다. 그땐 나도 어렸다. 해가 지나고 후배가 많아지면서 어느 순간 나의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의 꿈이 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은퇴 후 내가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보람된 삶’이다. 존경받는 선배로 살고 싶다.

후배들에게 우산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국내 골프 산업이 커지고 선수도 많아졌다. 하지만 환경은 더 안 좋아진 측면이 있다. 내가 골프를 배울 때는 골프장이 전국에 120개 정도였다. 지금은 550여 개가 된다. 하지만 선수들이 여유롭게 훈련할 골프장이 많지 않다. 예전에는 골프장에서 선수를 후원했다. 지금은 유망주를 위한 지원이 많지 않다. 선수를 지원할 수 있는 골프장을 찾아다니고 있다. 또 후배 선수들이 필요로 하는 환경을 만들려고 한다. 단단하게 만들려고 한다. 조금씩 실천하고 싶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 스포츠, 문화, 예술이 함께 할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 하나하나씩 작게나마 시작하고 싶었다. 내년 3월 오픈 예정인 용인시 ‘SERI PAK with 용인’이 그 시작이다. 이곳에서 인재를 키워나가는 교육과정부터 시작하고 싶다. 2년 전 이상일 용인시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용인시 발전에 관심이 많았다. 이후 여러 차례 미팅을 통해 많은 부분을 얘기했다. 용인은 지리적으로 서울에 근접하고 골프 환경이 좋다. ‘SERI PAK with 용인’에는 골프뿐 아니라 생활체육 시설이 들어간다. 야외 콘서트, 갤러리도 가능하다. 다양한 체험관도 생각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이런 공간은 처음이다.

차세대 골퍼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자질 이나 능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본은 스포츠맨십이다. 골프란 스포츠는 에티켓과 배려가 중요하다. 요즘에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다. 나만 잘하면 되지라는 마인드가 커졌다. 반대로 내가 부족한 부분도 알아야 한다. 우승한 상대를 시기 질투할 게 아니고 상대 선수에게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 동료 선수에 대한 존중, 배려가 부족한 부분은 아쉽다. 선수로서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존중과 배려다.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인생 가치나 철학이 있나. 하루하루 똑같은 마음으로 산다. 열심히, 부지런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유로움’도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시간을 가지고 싶을 때 시간을 가지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이 여유로울 수는 없다. 여유로움도 노력 속에서 얻은 것이다.

주위에 박세리 감독을 인터뷰한다고 했더니 결혼도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봐 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결혼 생각은 늘 있다. 연애부터 해야지 혼자 결혼할 수는 없지 않나. 언젠가 때가 되면 인연이 나타날 것 같다. 지인들이 소개해줘 몇 번 소개팅을 했는데 시작부터 편하지 않더라.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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