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 운전 차와 충돌 하반신 마비
좌절 대신 체육인 인생 2막 도전
“사격, 집중 요하는 골키퍼 닮아
2028 LA 패럴림픽 출전 목표”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이의 목소리는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찼다. 삶을 갉아먹는 절망 대신 빛나는 용기가 그를 감쌌다. 프로축구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골키퍼 장갑을 끼고 태극전사를 꿈꿨던 유연수(26)가 2022년 가을 제주 동료들과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만취 음주운전 차량에 부딪히는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지 2년 만에 장애인 사격 ‘선수’로 다시 돌아왔다. 불의의 사고를 딛고 이젠 소총을 들어 2028 로스앤젤레스(LA) 패럴림픽서 태극 마크를 꿈꾼다.
유연수는 지난 15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축구를 할 때도 태극마크를 다는 게 꿈이었다. 이제 장애인 사격선수로 2028 로스앤젤레스 패럴림픽에서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고 당차게 말했다. 유연수가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선수촌에서 소총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 대한장애인체육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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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수는 지난 15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사고 이후 병원에서 깨어나고 가장 충격받은 건 ‘더는 축구를 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기도 했다”며 “하지만 부모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고, 누나와 매형도 많은 힘을 줬다. 조카, 할머니까지 모든 가족이 자기 시간을 포기하면서 용기를 불어넣어 자신감을 얻었다”고 돌아봤다.
축구밖에 몰랐던 지난날이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초등학교 1학년 겨울 처음 축구공을 차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쭉 골키퍼 장갑을 꼈다. 고등학교를 거쳐 2020년 제주에 입단해 프로 무대에 뛰어든 그는 192㎝의 장신을 자랑하며 촉망받던 골키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그에게 프로 3년 차인 2022년 10월18일, 예기치 못한 사고가 불쑥 찾아온 것이다. 만취 운전자가 차를 들이받았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하반신이 말을 듣지 않았다.
유연수는 변화된 상황 속에서 좌절보다는 새로운 의미를 찾기로 했다. 2023년 겨울 제주서 눈물의 은퇴식을 치른 그는 1년이 지나 장애인 사격선수로 다시 승부의 세계에 들어왔다.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는 사명감도 생겼다. 유연수는 “바리스타나 재활센터 운영 등 여러 진로를 고민했지만, 지난해 병원에서 탁구 등 장애인 스포츠 종목들을 경험하며 흥미가 더 생기더라. 역시 나도 엄연한 ‘체육인의 피’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유튜브 채널 ‘위라클’을 운영하는 지체장애인 유튜버 박위씨를 보면서 나도 다른 분들께 용기를 주고 싶다고 다짐했다”며 “새로운 도전을 통해 누군가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떤 도전이라도 하고 싶었다”고 힘차게 말했다.
음주운전 탓에 또 다른 피해자가 억울한 일을 겪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에게 책임감으로 다가온다. 유연수의 선수 생명을 앗아간 가해자는 징역 4년에 그쳤고, 별다른 사과를 전하지도 않아 많은 공분을 샀다. 그는 “음주운전의 심각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피해 당사자가 되니 이렇게까지 힘들 줄 몰랐다. 내가 더 힘이 있을 때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판단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서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여러 장애인 스포츠 중 사격을 선택한 이유는 집중력이 요구되는 골키퍼와 닮았기 때문이다. 한 번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것도 매력적이다. 유연수는 “골키퍼는 90분 내내 집중해야 하는 포지션이다.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며 “사격도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선 언제나 10점대를 쏴야 한다. 9점대로 빠지는 순간, 다음 총알은 반드시 표적 가운데를 쏴야 하는 부담감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했다. 사격선수 출신 정진완 대한장애인체육회장도 유연수의 건장한 체격을 보고 공기소총을 권유하기도 했다.
유연수는 지난 16일 장애인 스포츠단 BDH파라스에 입단하면서 정식 선수가 됐다. BDH파라스는 2018 평창 겨울패럴림픽, 2024 파리 패럴림픽서 한국 선수단장을 맡은 배동현 창성그룹 부회장이 설립한 장애인 전문 실업팀이다. 유연수는 “입단 제안을 주셨을 때 너무 기뻤다”며 “이렇게 실업팀에 들어가는 건 참 힘든 건데, 기회를 주신 것이나 다름없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라고 의지를 다졌다.
장애인 사격선수로 변신한 유연수는 2028년 열리는 LA 패럴림픽에서 태극마크를 노린다. 그는 “축구선수일 때도 태극마크를 다는 게 최종 목표였다. 지금도 염원하는 게 국가대표 타이틀이다. LA 패럴림픽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다”며 “4년 뒤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겠다. 피나는 연습으로 목표를 이뤄 응원하는 팬들과 주변 분들께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꿈이다”고 말했다. 올여름 파리 패럴림픽 현장에서 대표팀 경기를 직접 관람하며 큰 감동을 느낀 유연수는 “보치아 종목 등 나보다 몸이 훨씬 불편한 데도 불구하고, 노력 끝에 메달을 따고 성취감을 얻는 걸 보면서 용기를 얻었다”며 “심장이 다시 뛰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유연수는 아직 소총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초보 사수’다. 지난 2일부터 장애인체육회 이천선수촌에 입소한 그는 사격 기본자세부터 익히고 있다. 유연수는 “모든 운동은 기본기가 중요하다. 축구선수 시절에도 기본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며 “많이 힘들고, 지치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나의 것을 찾고 있다. 재밌게 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웃었다.
끝으로 유연수는 ‘사격선수로서가 아닌, 20대 청춘의 나이에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결혼’이라고 수줍게 말했다. “사고 이후 부모님을 비롯해 누나와 매형, 그리고 조카의 응원을 받으며 버텨냈어요. 저도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숫기가 없어 쉽게 다가가지 못해 걱정이지만요(웃음).”
장한서 기자 jh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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