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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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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 구겨진 닥지에서 떠올라 대성당 창에 걸릴 때까지 [국현열화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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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명상의 미학 개척한 '방혜자'

    제1호 국비장학생…佛유학

    빛 형상, 탄생부터 소멸까지

    전통종이 닥지에 배여내다

    설치미술로 작품세계 확장

    샤르트르 대성당 창유리에

    절정감각 끌어낸 유작 설치

    빛 향한 갈망 평생 화두로

    韓佛 오가며 60여년 '변주'

    이데일리

    방혜자의 ‘하늘의 땅’(2011). 빛에 대한 갈망을 평생의 화두로 삼아 60여년 화업 내내 한결같은 작품세계와 작업태도를 지켜낸 작가다. 하지만 재료를 실험하고 기법을 바꾸는 일에는 거침이 없었다. 사각형 화면을 벗겨낸 작품은 작가 스스로 찾아간 진화의 길 그 한 갈래를 보여준다. 원형 속 핵에서부터 변화를 거듭한 색채가 띠를 이루며 퍼져나가는 표현은 하늘과 땅의 무한성, 나아가 우주가 분열하듯 뿜어내는 에너지를 압축하려 한 시도로 보인다. 고요하지만 강렬하게 퍼지는 공명은 원형이어서 극대화할 수 있는 중요한 효과다. 패널·종이에 천연안료, 179㎝(지름).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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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일리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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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윤 미술평론가] “작품을 보고 있으면 수직의 무명 같은 것, 그런 해뜨기 전의 아침을 느낀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가 남긴 말이다. 정확한 표현이다. 그의 그림은 화려하거나 강렬하지 않다. 손으로 짠 무명천처럼 정성이 깃들어 있고 정갈하다. 해뜨기 전 아침처럼 고요하고 희망적이다. 방혜자(1937∼2022), 평생 빛을 좇으며 그림을 그려온 ‘우리의 미술가’가 말이다.

    1937년 경기 고양군 능리(현재 서울 광진구 능동) 아차산 아래 마을에서 방혜자는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정원이 있는 집,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피어나는 꽃들, 시를 쓰던 외사촌 오빠와 수묵화를 그리던 외할아버지. 그의 유년 시절은 자연과 예술, 조용한 성찰의 순간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 환경은 방혜자를 자연스레 예술로 이끌었다.

    그림은 서양화가 김창억(1920∼1997)에게서 배웠다. 방혜자는 그를 “손이 아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게 해주신 분”이라고 회고한다. 눈앞의 대상을 단지 손기술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울림을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다. 훗날 추상화로 나아가는 데에도 이 가르침은 깊게 작용했다.

    “네 마음에 귀한 것이 있으니 열심히 해보라”던 이도 김창억이었다. 스승의 격려에 힘입어 방혜자는 열여섯 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당시 여학생이 ‘미술’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나서는 일은 지금만큼 흔하지 않았음에도 방혜자의 결심은 단단했다. 1956년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한 그는 서울을 내려다보며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

    그러나 이내 화폭은 눈에 보이는 형상에서 멀어지고 색과 터치가 중심이 되는 추상화로 옮겨갔다. 졸업을 앞둔 무렵에는 추상에 대한 관심이 더욱 짙어졌다. 알아볼 수 있는 형태는 사라지고 갈색·노란색·푸른색 면이 어우러진 회화가 등장했다. 당시 한국 화단을 휩쓴 추상화의 흐름 속에서 나온 작품이었다(‘지심’ 1961 등). 그 시기에 그린 유화 30여 점을 모아 서울 국립도서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1년 2월, 스물다섯 나이에 치른 매우 이른 데뷔였다.

    이데일리

    방혜자의 ‘지심’(1961). 우주 생성의 역사를 바탕으로 삼은 1960년대 작품이다. 추상미술에 입문하기 시작하던 시점이다. 그윽하지만 힘 있는 원색의 대비를 통해 인간을 초월하는 성스러움, 경건한 천상의 세계를 엿보게 한다. 필요 이상으로 격렬한 양적 팽창이나 감정의 과잉을 애써 눌러낸 붓힘의 균형감이 배어나온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00×8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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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이국땅에서 찾은 ‘뿌리’…빛으로 굳어져

    그러던 중 방혜자에게 이례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1961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돼 프랑스 파리로 떠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제1호 국비유학생이었다. 밤낮으로 프랑스어를 익힌 끝에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3년 동안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익혔고 벽화작업을 비롯해 모래와 석회를 섞어 매끈하게 표면을 만드는 ‘글라시 기법’도 배웠다.

    배움은 분명 흥미로웠지만 결코 쉬운 시간은 아니었다. 언어와 문화, 생활의 낯섦 속에서 방혜자는 눈물을 많이도 흘렸다. 기숙사 사감이 “방혜자가 흘린 눈물 때문에 센강 수위가 높아졌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만큼 외롭고 고단한 유학생활이었다.

    타향살이가 고될수록 방혜자는 더욱 깊이 그림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를 돌아보며 ‘그림이 자신을 살게 했노라’고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마치 정금이 불에 단련돼 나오듯 이 시절은 방혜자가 작업세계를 형성한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그런 시기를 지나 탄생한 방혜자의 작업은 아름다우면서도 독창적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색채다. 심연의 바다나 깊은 우주를 떠올리게 하는 푸른 화면 위로 영롱한 빛의 색이 번져나간다. 프랑스로 떠나기 전 그의 그림은 대체로 암갈색, 짙은 황토색, 어두운 군청색 같은 무거운 색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시간은 그의 팔레트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에메랄드 녹색, 상아색, 하늘색처럼 밝고 부드러운 색들이 화면을 점차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그림은 환해졌다. 위안을 찾아 그림 앞에 앉았던 나날들 끝에 마음속 빛이 마침내 발현된 것은 아니었을까.

    재료 또한 독특하다. “한국의 것을 잊지 말라”는 아버지의 조언이 마음에 남았던 걸까. 방혜자는 파리에서 캔버스 대신 닥지를 사용했다. 한국의 전통 종이인 닥지를 겹겹이 붙이고 구긴 뒤 그 뒷면에 물감을 칠해 은은한 색이 배어 나오게 했다. 반투명한 재료의 성질과 그로부터 스며 나오는 우아한 색채는 화면 속 빛과 색의 여운을 한층 깊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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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혜자의 ‘빛’(1981). 작가가 자주 사용한 한지의 투과성을 은은한 색감에 어울렸다. 화면 중앙을 사선으로 가른 밝은 면은 빛의 형상을 가시화한 것이면서 빛에 대한 작가의 명상과 고찰이기도 하다. 추상으로 빚은 하늘과 해, 산과 땅 위에 섬세하게 얹은 색채는 빛으로 가득찬 신비한 세상 어디쯤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캔버스·한지에 유화 물감, 80×8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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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방혜자의 작업에서 ‘빛’이라는 화두가 본격적으로 구현됐다. 빛을 주제로 삼게 된 계기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개울가에서 물속을 바라보고 있을 때 수초와 자갈돌이 아주 투명하게 비치고, 물결 위로 햇빛이 찬란하게 반짝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어린 나이에도 그 빛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를 생각한 것이 빛을 그리게 된 씨앗이 된 것 같습니다.” 프랑스라는 이국에서 자신의 뿌리를 되짚던 시기, 어린 시절의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고 결국 그의 화두가 빛으로 굳어진 것이었다. ‘아름다운 색채’ ‘닥지를 활용한 독특한 질감’ ‘빛’. 이 세 가지 요소는 방혜자 작업의 중심축이 됐다.

    작업의 방향이 잡힌 뒤에도 방혜자는 멈추지 않고 재료와 표현방식을 탐색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남프랑스에서 황토분이란 재료를 새롭게 발견하며 석채·식물염료와 같은 자연안료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근원이 되는 빛을 표현하는 데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물감을 만드는 것은 순리에 가까워 보인다.

    일흔에 설치작업…샤르트르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로 완결

    작품의 스케일 또한 점점 확장했다. 평면에 머물던 회화는 공간 전체를 품는 설치작업으로 발전했다. 그림을 원통형 구조물로 말아 천장에 매달기도 하고 때로는 바닥에 눕혀 설치했다. 벽에 걸려 있던 화면은 하늘과 땅으로 확장하며 마치 하나의 성소처럼 공간을 감쌌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회화를 바탕으로 설치로 나아간 것은 그의 놀라운 동시대적 감각을 보여준다.

    방혜자의 작업은 프랑스 미술계에서도 주목받았다. 그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2021년, 고딕 건축의 유산이자 ‘빛의 건축’이라 불리는 샤르트르 대성당 종교 참사회의실에 작품을 설치한 일이었다. “빛은 생명이고, 생명은 사랑이고, 사랑은 평화”라는 생각을 토대로 닥지에 그리던 ‘빛의 회화’는 스테인드글라스 형식으로 재해석돼 유리라는 새로운 매체로 구현됐다. 색색의 유리가 자연광을 받아 성당 내부로 빛을 흘려보내고 그의 그림은 하나의 창이 돼 실제 공간을 빛의 색으로 물들였다. 젊은 시절 순례자의 마음으로 바라보던 그 성당에 수십 년 뒤 자신의 작업을 설치하게 된 것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을 수놓는 170점의 작품 가운데 현대 작가는 단 한 명, 방혜자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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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방혜자. 2016년 9∼10월 일흔아홉에 서울 종로구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개인전 ‘성좌’를 열었던 때다. 당시 신작 ‘빛에서 빛으로’를 포함해 빛의 춤, 빛의 입자 등 빛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빛의 모습과 움직임을 형상화해 내면의 빛으로 이어낸 회화·설치작품 40여 점을 걸었더랬다. 현대화랑 제공.


    국내에서도 방혜자는 특별한 위치를 점한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평생 작업을 지속한 1930년대생 여성작가는 드물다. 존재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다. 게다가 추상화를 바탕으로 하되 앵포르멜이나 단색화, 기하추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고유한 작업세계를 구축했다. 그렇게 그는 온전히 자신만의 작업으로 한국 현대미술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빛의 파장처럼 퍼져나가던 방혜자의 예술. 60여 년 빛만을 좇은 그 여정은 2022년 10월 8일 프랑스의 한 병원에서 조용히 마무리됐다. 그의 나이 85세였다. 생전에 방혜자는 “보는 이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데서 화가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세상의 빛을 끌어다가 다시 세상에 되돌려주는 일이었다. 만약 새벽을 기다리고 있다면 방혜자의 작품 앞에 서보기를. 작품으로부터 번져나오는 빛을 가장 먼저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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