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2~13일·강동아트센터 ‘해리엇’
연출 김지원·배우 홍준기·정은혜 인터뷰
갈라파고스 거북과 자바원숭이의 동행
음성 언어·수어 통역…접근성 높은 연극
접근성 높은 연극 ‘해리엇’의 배우 홍준기와 수어 통역 배우 정은혜 [강동아트센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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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바다 가까운 곳에 자리한 어느 동물원. 갈라파고스 거북 해리엇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긴다. 오래 살아 더 느려지고, 오래 살아온 세월의 길이만큼 몸집이 커져 버린 해리엇. 175년의 긴 세월 동안 마음 깊은 곳에 바다를 품고 살아온 그의 곁에 어리고 외로운 자바원숭이가 선다. “넌 혼자가 아니야, 찰리.” 연극 ‘해리엇’의 한 장면이다.
무대에선 하나의 역할마다 두 명의 배우가 선다. 해리엇도 두 명, 찰리도 두 명. 공연계 필수인 ‘더블 캐스팅’이 아니다. 이 연극엔 온갖 언어가 공존한다. 거북 해리엇과 원숭이 찰리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음성 언어, 이들과 똑같이 연기하는 ‘그림자 소리’ 배우들의 수어, 스크린을 통해 담아내는 자막까지. 이런 이유로 ‘해리엇’의 앞에는 ‘접근성 연극’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누구나, 모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연극이라는 것이다.
연습이 한창인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만난 김지원 연출가는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보고 들을 수 있는 연극을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눈으로 듣고 귀로 본다…AI처럼 맞춘 음성 언어와 수어 통역 두 배우
눈을 감으면 다정한 해리엇의 음성이 귀에 감기고, 귀를 막으면 활자와 손, 표정으로 만들어낸 언어가 음악처럼 일렁인다. 몸과 몸을 맞댄 움직임은 정서를 직조한다. ‘해리엇’은 눈으로 듣고, 귀로 보는 공연이다.
한 역할에 두 사람, 무대 위의 두 배우는 쌍둥이처럼 움직임과 표정이 닮았다. 자바 원숭이를 연기하는 배우 홍준기와 ‘그림자 배우’ 정은혜는 성별도 외모도 다르지만, 저마다 찰리의 얼굴로 무대에 존재한다. 김지원 연출가는 “AI(인공지능)처럼 완벽한 싱크로율을 요구했다”며 웃었다.
배우들에겐 난관이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을 연기한다는 것, 무대 위에서 다른 언어(음성, 수어)로 같은 연기를 하는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접근성 높은 연극 ‘해리엇’의 연출가 김지원, 배우 홍준기, 수어 통역 배우 정은혜 [강동아트센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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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기와 수어 통역 배우 정은혜는 김지원 연출가의 ‘원픽’이었다. 김 연출가는 연극 ‘합체’, 뮤지컬 ‘푸른나비의 숲’ 등 수어 통역을 무대 위 또 하나의 언어로 선보이며 무장애 연극의 새 장을 열었다. 그의 작품에선 특히 수어 통역사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 연출가는 “수어 통역사는 반드시 배우여야만 했다”며 “수어의 리듬을 알아야 하고, 수어 통역사로서 해야 할 역할만이 아니라 찰리의 삶을 함께하는 그림자이자 이중 자아이기도 하고, 때론 찰리의 엄마이자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는 배우로 정은혜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두 배우에게 주어진 과제는 동일한 움직임, 판박이 연기였다. 가장 큰 고민은 ‘해리엇’ 세계관의 표현 방식이었다. 김지원 연출가는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 수준까지 동물이 돼야 할까에 대한 대화를 지속적으로 나눴다”고 했다. 무수한 과정을 거쳐 찾아낸 해답은 ‘동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원숭이의 민첩함과 동물원에 잡혀 온 찰리가 가진 불안을 표현하는 것을 적정선으로 삼았다.
공은 배우들에게 넘겨졌다. 홍준기는 “흉내 내기에 그치는 것은 지양했다”며 “사람이 있을 때는 원숭이로 보이되, 사람이 없을 때는 동물로 보이려 하지 말자는 스스로 정한 규칙이 있었다”고 했다. 정은혜는 홍준기의 몸짓을 따라갔다. 무용 전공자답게 긴장감 등 몸의 텐션을 무대에 설치된 구조물(동물 우리)에 맞춰 움직이며 드러내고, 감정 표현 방법을 고민했다. 현장에서도 두 사람은 찰떡 호흡을 자랑했다. 김 연출가는 “이 둘만 보면 음성 언어도 들리고 수어도 보인다”며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합이 척척 맞는다”며 감탄했다.
‘해리엇’은 갈라파고스 거북 해리엇과 어린 자바 원숭이 찰리의 따뜻한 동행을 그린 연극으로, 한윤섭 작가의 동명 동화를 무대로 옮겼다. 홍준기는 “단단한 내면을 가진 애어른 같은 자바원숭이 찰리와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나 자신을 투영해 연기했다”고 귀띔했다.
연극은 각색 과정에서부터 접근성 요소를 살리기 위해 원작을 재구성했다. ‘음성 해설’과 ‘대사’의 언어로 대본을 정리하고, 이를 수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거쳤다.
접근성 높은 연극 ‘해리엇’ [강동아트센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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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의 핵심’은 주인공들의 관계성을 통한 서사의 강화다. 원작과 달리 무대에선 해리엇과 찰리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이고, 해리엇의 내면 목소리를 꺼내와 음성 해설(내레이션)로 들려주며 극 안에서 관찰자가 아닌 주체자로 자리하게 했다.
“수어와 음성언어는 어순이 다르고, 음성언어엔 있지만 수어엔 없는 표현이 많아요. 예를 들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어?’라는 질문도 수어로는 성립할 수 없죠. 수어는 구체적이어야 하기에 ‘무엇’이라고 쓰지 않아요. ‘호랑이도 태어날래?’, 사자로 태어날래?‘하고 묻는 식이죠” (김지원, 정은혜)
음성 언어의 수어 통역 작업은 정교하고 섬세하다. 서로에게 딱 맞는 ‘또 다른’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홍준기는 “같은 언어인데도 이렇게 소통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며, 접근성 연극의 작업과 수어가 굉장히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커진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해리엇과 찰리의 동행은 ‘접근성 높은 공연’이라는 설명을 빼도 공연 언어로 온전히 존재할 따뜻한 작품이다. 오는 12~13일, 단 이틀간 강동아트센터에서 이어질 공연은 금세 매진을 기록했다. 김지원 연출가는 “아이들에겐 직관적 언어로 재미를 주고, 어른들에게 깊은 울림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편견은 지우고 접근성은 높여…이젠 하나의 장르로
다수의 공연 관계자들은 “모두를 만족시키는 무장애(배리어 프리, Barrier-free) 공연은 없다”고 말한다. 장애는 저마다 다르고, 장애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수준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우와 창작진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홍준기는 “‘해리엇’을 연기하며 무장애 공연을 올리는 과정이 이렇게 섬세하고 신경써야 할 게 많다는 것을 절감하며 굉장히 놀랐다”고 말한다.
음성 언어를 수어로 통역하고 연기하는 또 하나의 과정이 더해지니 제작비도 2~4배 더 든다. 때문에 일각에선 “무장애 공연=돈 많이 드는 공연”이라는 인식도 생겼다.
접근성 높은 연극 ‘해리엇’에서 자바 원숭이 찰리 역을 맡은 배우 홍준기 [강동아트센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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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은 그 모든 편견을 허무는 작업이다. 무대 위에선 다양한 언어(자막, 수어 통역, 음성 언어, 해설)가 더해지면 산만하다는 선입견, 그로 인해 관객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편견을 깨부순다. 무대 밖에선 ‘무장애 연극’은 공력과 제작비가 많이 들고 자칫 잘못하면 질책만 받는다는 편견에도 맞선다. 이 공연이 ‘무장애’ 대신 ‘접근성(휠체어석, 수어 통역, 한글 자막, 음성 해설, 점자 프로그램, 터치 투어) 높은’ 연극이라는 수사를 스스로 붙인 이유다.
김지원 연출가는 2004년 한 장애인 극단에 자원봉사를 갔다 우연히 연출을 맡은 일을 계기로 20년 넘게 장애 예술인과 함께하며 접근성 높은 공연을 올리고 있다.
“어느 순간 배리어 프리라는 말이 생겼지만, 모든 장벽을 없앨 수는 없어요. ‘완벽하진 않지만 우리 이번에 여기까지 준비했어’, 이런 생각으로 공연하고 있어요. 한 공간에서 다양한 언어로 소통하고, 모두가 손뼉 칠 수 있는 접근성이 높은 공연으로요.” (김지원)
접근성 높은 공연을 올리는 것이 배우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홍준기는 “사실 배우에게도 이러한 작업은 쉽지 않다. 수어를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모두가 멈춰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며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서로를 위한 배려로 엮여있다. 모두의 이야기를 하나로 담아 객석까지 닿도록 에너지를 쓰는 이 작업이 내겐 우주 같다”고 했다.
무용을 하던 중 우연히 수어를 배웠고, 장애 예술까지 영역을 확장한 정은혜는 “수어를 배우고 장애 예술계에 들어오며 다양한 장애인 친구를 가진 것이 내겐 큰 자부심이자 인간으로서 확장되는 경험이었다”고 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김지원 연출가도 이야기를 보탰다.
“겁 없이 도전했던 이 일이 하나의 예술 장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배리어프리라는 말이 생기며 관객에게도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접근성 공연은 접근성을 넘어 한 사회가 가져야 할 가치라고 생각해요. 배우들처럼 자기 삶에서 작게나마 인식의 변화가 오는 것, 그렇게 천천히 달라지는 이 모든 과정이 접근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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