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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이슈 가상화폐의 미래

    [블록체인 칼럼]원화 스테이블코인, 통제의 대상에서 금융 인프라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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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자신문

    김선미 동국대 교수


    스테이블코인은 우리나라에서 해외송금이나 팬덤 경제, 디지털 콘텐츠 결제 등에서 효용이 있지만, 외환관리와 자본거래 규제가 높아 시도조차 어렵다. 원화 영역에서는 신규 효용이 적고, 효용이 큰 국경 간 흐름은 규제로 막혀 '틈새가 있는데 못 들어가는' 역설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가상자산 온램프가 은행 실명계좌에 종속돼 있어 결제·정산 사업자로의 전환 경로가 막혀 있고, 루나·테라 사태 이후 감독은 사고 예방 중심으로, 산업은 자기 검열 중심으로 바뀌면서 '작게·빨리·공개적으로' 실증할 기회를 잃었다. 실증이 없으니 데이터가 없고, 데이터가 없으니 규제는 더 보수화된다. 토큰증권(STO)도 결제·증거금이 토큰 네이티브가 아니어서 원화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부재가 비용과 마찰을 키우고 있다. 결국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결제 계정체계, 회계·감사 표준의 미비가 근본 원인이다.

    한국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 개선을 위해서는 각 주체가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 지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먼저 국회는 규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24개월 한시적 세이프하버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을 결제·정산용으로 한정하되 개인·법인별 월 거래한도를 설정해야 한다. 또 준비금 100% 예치, 실시간 상환, 주간 공시, 외부감사 등 명확한 의무를 법률로 규정하고, 일정 기간 후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도를 재설계하는 선셋·리셋 구조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금융당국의 해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비조치의견서 제도를 법률에 명문화해 행정지침 의존을 벗어나야 한다. 현재 국회에서 여러 발의안이 제안됐으나 지지부진이다. 국회는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을 병합·조정해 '실증 우선' 법안을 신속히 통과시켜, 논의의 지연을 제도적 실행으로 전환해야 한다.

    감독기관은 실증이 가능한 '파일럿 인가 체크리스트'를 공개하고, 심사보다 데이터 기반 검증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체크리스트에는 준비금 자산 구성, 상환속도, 분리보관 구조, 스트레스 테스트, 온체인 증명 방식 등이 구체적으로 포함돼야 하며, 사고 보고·공시 절차 또한 표준화해야 한다. 초기에는 STO 결제, 팬덤 결제, 플랫폼 간 정산 등 저위험 트랙으로 시작해 실적과 리스크 지표에 따라 상한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한국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이 통화정책을 훼손하지 않도록 정책무해성 기준을 수량적으로 명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발행 잔액을 제한하고, 준비금은 국채나 지준예치금 등 정책중립 자산으로만 구성하도록 제한할 수 있다. 기획재정부와 외환당국은 해외송금 및 콘텐츠 정산 등 실질 효용이 있는 영역에서 제한적 국경 간 실험을 허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K콘텐츠 로열티 정산이나 글로벌 게임 결제 환불 등 화이트리스트 업종을 지정하고, 거래 한도를 설정한 뒤 등록된 해외 결제사업자만 참여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자본거래 신고를 자동화하는 기반 간소화 절차를 마련하면 행정 부담을 줄이면서도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 시중은행과 전자금융업자는 스테이블코인을 직접 발행하기보다는 준비금 수탁, 상환 대행 등 참가형 모델로 진입해야 한다. 이를 통해 리스크를 분산하고, 발행사 대신 안정적인 결제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다. 준비금 운용 수익은 사용자 보호 기금이나 상환유동성 확보에 우선 배분하고, 은행의 KYC 결과를 재사용할 수 있는 토큰 체계를 도입해 비용을 줄여야 한다. 이처럼 각 주체가 '작게, 빠르게, 공개적으로' 움직일 때, 한국의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회색지대에서 벗어나 실험과 데이터 기반 제도로 진입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결제 인프라를 보유한 나라지만, 그 완성도가 오히려 새로운 기술의 진입 여지를 좁히는 역설을 낳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화폐의 대체물이 아니라, 정산의 새로운 프로토콜이자 금융 효율성과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는 기반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허용 여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 책임 있게 작동할 수 있을지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일이다. 명확한 작동조건의 설정은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이는 곧 책임 있는 개방으로 이어진다. 한국은 이제 '금지의 시대'에서 '조건의 시대'로, 통제 중심의 접근에서 신뢰 기반의 혁신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한국이 디지털 금융 질서에서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고, 미래 금융 패러다임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길이다.

    김선미 동국대 경영전문대학원 핀테크&블록체인 책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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