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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7 (일)

    이슈 미술의 세계

    "K팝이 전부가 아냐"…진정한 한국의 美를 찾아서 [아트인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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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예술관광 투어

    13개국 22명 여행객 참여

    일제시대 문화재 지킨 간송

    ‘보화비장’ 7인 컬렉터 조명

    템플스테이 체험에 열기 가득

    이데일리

    간송미술관에서 전시를 관람 중인 외국인 여행객들 (사진=이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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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일리 이민하 기자] “작품 속 한국인의 저항정신이 담겨 있다는 점이 감동적이었습니다.”

    한국 문학에 관심이 많다는 카자흐스탄인 가우카르 씨는 간송미술관 전시실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간송 전형필이 전 재산을 바쳐 지켜낸 고려청자가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간송 선생이 지키고자 한 건 예술이 아니라 자기 민족에 대한 믿음이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는 경이로운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지난 18일 정오 무렵 한성대입구역 앞에는 영어와 프랑스어 베트남어와 스페인어가 섞인 대화가 가을바람처럼 흩어졌다. 서울관광재단이 준비한 ‘아트 인 서울’(ARTS IN SEOUL) 깃발 아래에 13개국에서 온 22명의 외국인이 모였다. K팝, K드라마를 따라 한국을 찾던 여행자들이 이번엔 ‘예술’을 따라 성북동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서울관광재단이 올해부터 시범 운영 중인 ‘예술관광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재단은 K팝, K드라마 다음으로 K예술을 신규 관광자원으로 만들기 위해 예술관광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 중이다. 이번 성북 투어는 그 프로그램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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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송미술관에서 전시를 관람 중인 외국인 여행객들 (사진=이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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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수탈 막아선 한 부호의 신념


    참가자들을 태운 버스가 간송미술관 앞에 멈췄다. 1938년 간송 전형필(1906~1962)이 문화재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간송은 일제강점기 조선 문화재가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예술품을 사들이는 데 전재산을 사용했다. 훈민정음해례본, 상감 운학문 매병, 겸재 정선의 산수화까지. 오늘의 국보가 된 다수가 그의 손을 거쳤다. 그가 모은 문화재는 5000여 점. 그 컬렉션을 보관하기 위해 1938년 ‘보화각’을 세웠고, 그것이 지금의 간송미술관이다.

    현재 전시 중인 ‘보화비장’은 이병직 윤희중 등 7명의 컬렉터가 간송에게 넘긴 작품을 다룬다. 아르메니아에서 온 니코 고시안 씨는 “문화재를 지키는 게 나라의 정신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간송 선생이 증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국적은 물론 나이, 성별이 제각각인 참가자들은 저마다 작품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간송이 전 재산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한국의 정신이 국경을 넘어 이방인들의 마음에 닿는 순간이었다. 수백 년을 견딘 청자의 푸른 빛깔이, 겸재 정선이 그린 산수화의 붓질이, 일제의 수탈 속에서도 끝내 빛을 잃지 않은 한국 예술이 지금, 외국인 여행객 앞에서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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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사 김영한 여사의 초상을 모신 사당 (사진=이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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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억 요정을 절에 바친 한 여인의 결단


    간송미술관에서 길을 틀어 성북동 주택가로 들어서자, 골목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낮은 담장 너머로 단풍이 묶음처럼 흔들리고 그 아래로 단청이 선명한 일주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상사(吉祥寺). 이름처럼 좋은 기운이 서린 절이었다. 문을 지나자 오래된 향 냄새가 흐릿하게 퍼졌다. 서울 한복판에서 느끼기 어려운 기운이었다.

    길상사는 겉모습보다 안쪽 이야기가 더 깊은 사찰이다. 1997년 법정 스님이 창건한 이 절은 그 이전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이었다. 1970~1980년대 서울의 밤을 움직이던 상류층의 자리. 그 공간을 지켜온 이는 김영한(1917~1999) 여사였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인물. 그는 해방 이후 대원각을 운영하며 성공했고, 어느 해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를 읽고 삶을 다시 정리했다. 7000여 평의 땅과 수십 채 건물을 절로 바치겠다고 청한 것은 그 뒤였다. 시가로 약 1000억 원. 거절과 설득이 10년을 오갔고 마침내 절이 세워졌다. 절 안에 놓인 초상화는 그 여정의 시간을 조용히 말해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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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사에서 스님과 산책을 하고 있는 외국인 여행객들 (사진=이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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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 투어가 끝날 무렵, 참가자들은 신발을 벗고 법당으로 들어갔다. 오후 햇살이 문턱까지 번지고 바닥에 조용히 앉은 이방인들의 표정은 차분해져 있었다. 스님은 미소를 띠고 자리에 앉았다. 통역이 옆을 지키자 질문이 하나둘 이어졌다. “명상은 잘하는 법이 있나요?”, “사람 때문에 힘들 때는 어떻게 하나요” 등등. 가벼운 호기심부터 깊은 고민까지. 스님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가을 오후가 더 느리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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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상사 템플스테이에서 단청 키링을 만든 외국인 여행객 (사진=이민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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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단청 키링 만들기가 시작됐다. 붉은색, 녹색, 황색. 참가자들은 자신이 고른 색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대만에서 온 데이비드 신 씨는 “보는 여행이 아니라 만드는 여행이라서 더 특별하다”고 말했다. 손끝에서 작은 단청이 완성될 때마다 환한 표정이 번졌다. 70분이 금세 흘렀다.

    법당을 나섰을 때 경내에는 낙엽이 얇게 깔려 있었다. 13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 만든 키링을 쥔 채 작은 웃음을 나눴다. 문화가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방금까지의 시간은 모두를 같은 곳으로 데려다 놓은 듯했다.

    버스가 다시 성북동을 벗어나자 김은해 디앤지투어 대표는 “한국 예술은 아직 관광객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보물 같은 분야”라며 “관심은 분명히 늘고 있어 앞으로 더 커질 시장”이라며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3시간 반 남짓한 여정. 그러나 그들이 만난 것은 전시나 사찰만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전 재산을 바쳐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의 신념. 평생 모은 재산을 기꺼이 내놓은 김영한 여사의 결단. 그 시간이 쌓여 만들어낸 예술의 깊이가 여행자들의 마음 위에 내려앉았다. 서울의 오래된 이야기가 그렇게 여행자들의 오후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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