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먹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때는
비싼 정찬을 먹을 때가 아니라
그냥 흰죽 한 그릇을 먹을 때
말갛게 밥물이 퍼진,
간장 한 종지를 곁들여 내온
흰죽 한 그릇
늙은 어머니가 흰쌀을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이는
가스레인지 앞에 오래 서서
조금씩 조금씩
물을 부어 저어주고 (후략)
- 고영민 '흰죽' 부분
감격은 늘 풍요가 아닌 결핍에서 온다. 어느덧 나이 들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평온했던 일상이 그동안 함부로 대했던 몸 때문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될 때, 평소 잘 찾지도 않던 흰죽 한 그릇은 가슴 벅찬 위로가 된다. 춥고 쓸쓸한 결핍을 충족시키려 온종일 답안지 없는 세상을 돌아다닌 저녁이면 흰죽 한 그릇이 생각난다.
고통 뒤에 만난 흰죽엔 한 점의 불순물도 없어 더 아름답다. 정신의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날마다 기억 속 흰죽은 위안이 된다. 흰죽은 우리 모두의 기원이고, 어머니의 흰죽은 사랑의 가장 깊은 형식이다.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시인)]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