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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8 (목)

    [시가 있는 월요일] 하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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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무엇을 먹는다는 것이 감격스러울 때는

    비싼 정찬을 먹을 때가 아니라

    그냥 흰죽 한 그릇을 먹을 때

    말갛게 밥물이 퍼진,

    간장 한 종지를 곁들여 내온

    흰죽 한 그릇

    늙은 어머니가 흰쌀을 참기름에 달달 볶다가

    물을 부어 끓이는

    가스레인지 앞에 오래 서서

    조금씩 조금씩

    물을 부어 저어주고 (후략)

    - 고영민 '흰죽' 부분

    감격은 늘 풍요가 아닌 결핍에서 온다. 어느덧 나이 들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평온했던 일상이 그동안 함부로 대했던 몸 때문에 무너질 수도 있음을 알게 될 때, 평소 잘 찾지도 않던 흰죽 한 그릇은 가슴 벅찬 위로가 된다. 춥고 쓸쓸한 결핍을 충족시키려 온종일 답안지 없는 세상을 돌아다닌 저녁이면 흰죽 한 그릇이 생각난다.

    고통 뒤에 만난 흰죽엔 한 점의 불순물도 없어 더 아름답다. 정신의 소화불량에 시달리는 날마다 기억 속 흰죽은 위안이 된다. 흰죽은 우리 모두의 기원이고, 어머니의 흰죽은 사랑의 가장 깊은 형식이다.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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