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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뮤지컬' 몽유도원, 한국적 서사로 브로드웨이 정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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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윤호진 연출가와 배우들이 서울 성북구 성신여대에 위치한 뮤지컬 '몽유도원'의 연습실에서 장면을 상의하고 있다. 김재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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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3일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뮤지컬 제작사 에이콤의 연습실. 가야금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원목 바둑판을 사이에 둔 두 배우가 가부좌를 틀고 날 서린 눈빛을 주고받고 있다. 아름다운 여성 아랑을 취하고자 하는 개루왕 여경과 아내 아랑을 지키려는 남편 도미의 치열한 신경전. 팽팽한 긴장감이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몽유도원'은 삼국사기에 전해지는 도미와 아랑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최인호의 소설 '몽유도원도'를 원작으로 한다. 꿈에서 아랑을 만나 매혹됐던 대왕 여경은 현실에서 그를 다시 마주하자 강제로 혼인을 추진하고, 도미와 혼인 관계였던 아랑은 생이별을 맞는다. 재회를 시도하던 도미는 여경에 의해 눈이 멀고, 아랑은 스스로 얼굴을 갈대로 문질러 지워버리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를 앞세워 국내 뮤지컬 업계 최초로 미국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던 에이콤은 신작 '몽유도원'으로 다시 한번 미국 시장을 조준한다. 에이콤은 한국적 정서를 무대 언어로 구현해 차별화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창극 배우와 소리꾼을 기용하고, 수묵화 작가를 무대 시각화 작업에 참여시키는 등 기존 뮤지컬 제작 관행에서 보기 어려웠던 시도에도 나선다. 백제 관련 박물관을 돌며 고증을 거쳤고, 의상은 한국과 중국에서 특수 제작을 병행할 예정이다. 국립극장 대관 일정이 제한적인 점을 고려해 제작발표회는 화성 예술의전당에서 진행된다.

    이날 찾은 연습실에서는 아랑 역으로 뮤지컬에 처음 도전하는 국악계 스타 하윤주와 비아 역을 맡은 소리꾼 정은혜의 구성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작품의 한국적 색채가 단숨에 드러났다. 특히 아랑 역의 하윤주 배우는 국악 출신으로 뮤지컬에 처음 도전했음에도 어색함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소리꾼 정은혜 특유의 발성 역시 노래가 아닌 대사를 짧게 읊조렸을 뿐인데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사람이 녹음에 참여한 '몽유도원'의 오프닝 넘버는 소리꾼 정은혜의 창으로 시작해, 도미와 아랑의 애틋한 그리움과 사랑이라는 극의 핵심 정서를 초반부터 단숨에 그려냈다. 극의 전개 역시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역시 도미와 아랑, 대왕 여경의 삼각관계가 격해지며 여경이 끝내 도미의 시각을 앗아가는 장면이 끝나자 연습실에는 '한'의 여운이 짙게 남았다. 엎드려 절규하던 배우들은 이내 숨을 고르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연습실 중앙에는 윤호진 연출이 서 있었다. 2002년 초연된 자신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몽유도원'은 그에게 오래된 숙원에 가까운 프로젝트다. 1948년생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배우들의 동선을 직접 시연하며 연출에 여념이 없었다. 장면 전환을 위한 반주 길이를 2마디에서 4마디로 늘려달라고 주문하는가 하면, 한 배우에게는 감정의 결까지 짚으며 세밀한 디렉팅을 이어갔다.

    '몽유도원'이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두는 이유는 보편성에 있다. 인간의 욕망과 폭력, 사랑과 상실을 다룬 이야기인 만큼 보편적 정서에 호소할 여지가 크다는 판단이다. 제작진은 이 작품이 선악의 이분법으로 설명되지 않는 비극을 담고 있으며, 서양 서사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상징성이 오히려 세계 무대에서 낯설고 강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 특히 중시되는 지점은 '시간의 감각'이다. 작품은 관객이 일상에서 체감하는 물리적 시간을 지우고 꿈과 현실, 비극이 교차하는 상징적 시간으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구조를 취한다. 관객이 공연 도중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않게 되는 상태를 하나의 완성 기준으로 삼고 있다.

    1976년 연극 '그린 줄리아'로 데뷔한 윤호진은 내년이면 연출 인생 50주년을 맞는다. 연수차 영국을 찾았다가 현지에서 뮤지컬을 관람한 것을 계기로, 그는 뉴욕 유학을 결심하며 본격적인 뮤지컬 연출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뉴욕 유학 시절 브로드웨이에 상연되는 작품들을 관람했던 그는 당시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며 분명한 목표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뉴욕을 떠나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내 작품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었다. 그 결심은 10여 년 뒤 '명성황후'로 이어졌다. 이 작품은 한국 뮤지컬 최초의 브로드웨이 진출작으로 기록됐다.

    최근 한국 창작 뮤지컬이 잇달아 해외에서 성과를 내고 있는 흐름에 대해 그는 후배 세대가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한국적 색채를 유지한 채 세계 시장과 소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로 확인됐다는 판단이다.

    '몽유도원'은 내년 1월 서울 국립극장 공연과 4월 샤롯데씨어터 재공연을 거쳐 2028년을 목표로 브로드웨이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윤홍선 에이콤 대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우리의 오랜 신념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단순한 번역 무대가 아닌, 우리만의 색채와 정서로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을 선보이겠다"고 포부를 전했다.

    [구정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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