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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28 (일)

    “오른손으로 폭탄 투척, 왼손으로 권총 난사” 의열단원 나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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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1926년 12월 28일 34세

    조선일보

    나석주 의사


    99년 전인 1926년 12월 28일 황해도 재령 출신 34세 나석주(1892~1926)는 경성 황금정 2정목(현 을지로 2가)에서 일제 경찰과 대치하다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제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와 식산은행(식은)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 등 7명을 사살한 직후였다.

    일제 당국은 곧바로 보도 금지령을 내렸다. 보도 금지는 이듬해 1월 13일 풀렸다.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다. 4쪽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이었다. 호외는 세 차례 압수됐고 네 차례에 걸쳐 발행됐다.

    조선일보

    나석주 호외. 1927년 1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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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일보는 이 사실을 지면에 실어 독자에게 알렸다.

    “근래 희유의 동 사건이 돌발되매 사건이 발생되자 즉시 게재 금지의 처분을 받은 이래 본사에서는 그 발표될 날을 기다리며 널리 기자를 특파하야 그 사건의 상세 사항을 조사하는 등 각 방면으로 모든 준비를 정돈하든 중 동 사건이 십삼일 오전 열한시에 경무 당국으로부터 발표되자 본사에서는 즉시 그 사건의 상세 사항을 기록하야 전후 4페이지나 되는 호외를 발행하였든 바 돌연히 당국으로부터 발매금지의 처분이 있었음으로 이어서 제2 호외를 발행하였으나 또 다시 압수를 당하고 또 뒤를 이어 제3호외를 발행하였으나 또한 발매금지를 당하고 간신히 제4호외를 발행하였다.”(1927년 1월 14일자 석간 2면)

    조선일보

    4쪽에 이르는 호외, 잇달아 3차례 압수. 1927년 1월 14일자.


    발행된 호외마저 온전한 형태가 아니었다. 일제 당국은 제목과 주요 내용 등을 깎아냈다. 호외 1면 메인 제목은 ‘OOOO 나석주(羅錫疇)/ 식은(殖銀)과 동척(東拓)을 OO/ 우수(右手)로 폭탄투척 좌수(左手)로 권총난사/OOOOOOOOOOOO’(1927년 1월 13일자 호외 1면)였다. 호외 2면과 3면은 사진만 남고 기사는 거의 대부분 깎여 내용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독자들은 사건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메인 제목 ‘나석주’ 앞에 깎인 4글자 부분은 잘 살펴보면 ‘의열단원’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건 전말은 1월 14일 자 2개 면에 걸쳐 자세히 실렸다.

    조선일보

    1927년 1월 14일자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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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석주는 거사 직전 조선일보사에 편지를 보내 의거 계획을 미리 알렸다. 극비로 계획한 의거를 미리 알릴 만큼 조선일보를 절대적으로 신뢰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사 귀중. 본인은 우리 2천만 민족에 생존권을 차자(찾아) 자유와 행복을 천추만대(千秋萬代)에 누리기 위하여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왜적(倭敵)의 관·사설기관(官·私設機關)을 파괴하려고…”

    나석주는 조선일보에 편지를 보내는 이유를 적었다. 그는 “최후 힘을 진력(盡力)하여 휴대물품(携帶物品)을 동척회사 식산은행에 선사하고 힘이 남으면 시가화전(市街火戰)을 하고는 자살하겠기로…”라고 쓴 뒤 “본인의 의지를 귀보(貴報)에다 소개하여 주심을 바랍니다”라고 썼다. 거사를 널리 알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조선일보

    나석주 의사가 거사 전 조선일보사에 보낸 편지. 1947년 12월 28일자 2면.


    자결하려는 이유에 대해서도 상세히 밝혔다. “본인이 자살하려는 이유는 저 왜적의 법률은 우리에게 정의를 주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데 불행히 왜경(倭警)에게 생금(生擒·사로잡힘)이 되면 세계에 없는 야만적 악형을 줄 것이 명백하기로 불복(不服)하는 뜻으로 현장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나석주 편지는 당시 조선일보 사진기자 문치장이 찍어 편집국에 간직하고 있었다. 21년 후인 1947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에 처음으로 실리며 세상에 알려졌다. 해방 때까지 20년간 거사 계획 편지를 보냈다는 기밀이 새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나석주 편지를 읽고 당시 지면을 살펴보면, 당대 기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취재해 자세히 기사를 썼는지 새삼 느껴진다.

    [이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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