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최초 토니상 ‘화려한 축포’…경쟁력 확인
글로벌 성공 위해 지원보다 고질병 수습 먼저
대대적 체질 개선 통해 건강한 창작 환경 조성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NHN링크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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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국계 배우가 클레어로 출연해 ‘제주’라고 말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울컥하더라고요.”
미국 뉴욕 맨해튼 44번가, 벨라스코 극장 앞은 매일이 장사진이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브로드웨이 버전을 만나려는 관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서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뮤지컬 ‘말리’의 김선재 연출가는 “‘어쩌면 해피엔딩’을 미국에서 두 번이나 봤는데 지금도 객석 점유율이 98%나 된다”며 감탄했다.
K-팝, K-드라마, K-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도장 깨기 하며 나아갈 때 사실 뮤지컬은 지지부진했다. ‘현지화(로컬라이징)의 예술’이라는 높은 진입장벽에 갇혀 모두가 브로드웨이를 바라봤지만, 누구도 쉽사리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벽이 올해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으로 시원하게 깨졌다. 다만 화려한 축포는 터졌어도 그 이면의 그림자는 여전히 짙었다.
글로벌 진출의 두 활로…‘어쩌면 해피엔딩’과 ‘위대한 개츠비’
‘기적의 팡파르’가 울렸다. 2016년 서울 대학로 소극장에서 막 올린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브로드웨이의 심장부에서 토니상 6관왕을 거머쥔 것이다. 이는 ‘기생충’의 아카데미, ‘오징어게임’의 에미상 수상, 방탄소년단의 영미 팝시장 정복에 비견될 쾌거였다.
원종원 순천향대 SCH미디어랩스 학장은 “‘어쩌면 해피엔딩’의 토니상 수상은 서구 자본과 백인 중심 장르의 견고한 유리천장을 깨부순 엄청난 사건이자 한국 뮤지컬의 가장 충격적 장면”이라고 했다.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 콤비의 ‘어쩌면 해피엔딩’은 우연히 태어난 작품이 아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헬퍼봇’의 이야기를 담은 무대는 한국의 뮤지컬 문법과는 다른 환경에서 세상에 나왔다. 2014년 우란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시작해 미국 리딩, 한국 트라이아웃(시험 공연)을 거쳐 10년간의 수정, 보완을 거쳤다. ‘숙성의 미학’이 빚어낸 결과는 한국을 넘어 미국까지 홀렸다.
지혜원 경희대 교수는 “기존 정부 지원 시스템 밖에서 태생부터 글로벌 시장을 지향한 전략이 적중했다”고 분석했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중 ‘뉴 머니’ 무대 [오디컴퍼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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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해피엔딩’과 함께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 깃발을 꽂은 또 다른 작품은 ‘위대한 개츠비’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지식재산권(IP) 주권을 지킨 K-뮤지컬이었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한국 프로듀서와 한국 자본이 거둔 성과다.
이 작품은 ‘드라큘라’, ‘데스노트’, ‘지킬 앤 하이드’와 같은 히트작을 낸 오디컴퍼니 신춘수 대표가 기획과 개발, 투자를 주도하며 브로드웨이 창작진과 손잡고 세상에 내놓았다. 개막 3주 만에 주당 매출액 129만 달러(한화 18억원)을 돌파하며 밀리언 달러 클럽에 입성했고, 린다 조가 토니상에서 의상 디자인상을 받았다.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를 거쳐 한국에 상륙, 글로벌 도약의 또 다른 길을 개척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창작 역량과 기획 역량이라는 ‘상반된 모델’을 선보인 두 작품은 이후 K-뮤지컬의 해외 진출 전략에 중요한 시사점을 안겼다.
요즘 관객과 만나고 있는 뮤지컬 ‘말리’ 사례도 흥미롭다. 2018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개발, 2021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서 창작뮤지컬상을 수상했다. 2022년 한국에서 트라이아웃을 거친 뒤, 2023년 예술경영지원센터 영미권 중기 개발지원 사업에 선정, ‘플라이 투 투모로우(Fly to Tomorrow)’라는 제목으로 미국 뉴욕 극장에서 브로드웨이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낭독 공연을 마쳤다. 최근 한국 초연으로 개막한 작품엔 브로드웨이에서 활동 중인 연출가 김선재가 참여했다. 한국 무대 이후 브로드웨이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최승연 뮤지컬 평론가는 “‘어쩌면 해핑엔딩’ 이후 제2, 제3의 작품들이 새로운 전략으로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를 공략하는 모습이 보인다”며 “이전엔 상상을 통해 꿈꿨던 일들에 전략적 노하우를 더하며 단순히 로컬에서만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영미권으로 뻗어나가려는 전략적 흐름이 눈에 띄는 해”라고 했다.
뮤지컬 ‘한복 입은 남자’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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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마 지원’ 보다 고질병부터 고쳐야
토니상의 사회적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정부의 K-뮤지컬 지원 예산이 31억원 244억원으로 8배나 폭증했다. 이중 160억원은 대형 창작 뮤지컬 개발을 위한 신규 사업에 투입된다.
업계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다. 담아낼 그릇이 마땅치가 않아서다.
‘묻지마 지원’ 격으로 돈을 쏟아붓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지혜원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학과장은 “전문적인 컨트롤 타워나 예술감독 시스템 없이 예산만 쏟아붓는 것은 눈먼 돈으로 전락할 수 있다”며 “감시와 효율적 집행이 절실하다”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한국 뮤지컬계는 해마다 외형적 성장을 거두고 있지만, 산업 이면엔 해결해야 할 구조적 문제가 산적해 있다. 예산 증액 이후 이를 집행할 시스템과 제도를 보완하고, 업계의 고질적 한계를 먼저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선 사상 처음으로 티켓 판매액 5000억 원(예술경영센터 집계)을 돌파할 정도로 시장 규모가 거대해졌지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 심각해졌다는 점이다.
‘알라딘’, ‘위대한 개츠비’와 같은 대작 신작을 비롯해 ‘킹키부츠’, ‘위키드’, ‘물랑루즈’ ‘비틀쥬스’ 등이 무대에 돌아왔으나, 대극장 창작 뮤지컬은 ‘한복 입은 남자’ 한 편에 불과하다. 양적 성장의 배경엔 강력한 스타 파워와 안정적인 스테디셀러, 초연이라고는 하나 라이선스 히트작이라는 공통점이 자리했던 것이다.
뮤지컬 ‘알라딘’ [클립서비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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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연 평론가는 “창작 초연작(문예회관, 중소극장 기준)은 대략 70편대인데 반해, 올해 대극장 창작 뮤지컬은 한 편뿐이었다”며 “대중적 확산력을 갖기 위해선 대극장 신작이 올라가야 하는데 시장 확장을 견인할 킬러 콘텐츠가 부재한 올해는 대극장의 한계점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스타 캐스팅 역시 고민의 지점 중 하나다. 스타 캐스팅은 여전히 흥행 공식 중 하나지만, 작품에는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어서다. 작품성보다는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의 존재가 흥행이 잣대가 된 구조가 굳어지면서 작품성 있는 작품들이 설 자리가 좁아질 수 있다.
실제로 뮤지컬 ‘데스노트’는 올해 업계에 많은 고민을 안겼다. 김준수, 홍광호 등 업계 최고의 스타 배우들이 빠지자, 콘텐츠의 힘도 증발했다. 흥행 성적표는 내놓기 민망할 정도로 저조하다.
지 교수는 “지금 뮤지컬계의 스타 중심 시장의 폐해로 ‘되는 작품만 되고 안 되는 작품은 외면받는’ 양극화가 심화하고 있다”며 “신진 배우 발굴과 실험적 작품 제작을 위축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작품성으로 관객을 모을 수 있는 작품을 늘려야 한다”고 꼬집었다.
대대적 분갈이 통한 체질 개선…발칙한 상상력 키우려면?
“토니상 또 받을 수 있나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던지면 업계에선 ‘헛웃음’을 친다. 업계 관계자들은 “현재와 같다면 다시 못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물론 토니상으로 퀀텀 점프를 시도한 한국 뮤지컬계의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소위 ‘골든 타임’인 셈이다. 업계에선 시장 확장과 더불어 내실을 탄탄히 해 토니상이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가능한 도약을 이어가기 위해 대대적인 ‘체질 개선’의 계기가 돼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은다.
원종원 교수는 “이번 ‘토니상’의 성취가 우연히 천재나 돌연변이 같은 사람이 나와 뮤지컬계를 변화시킨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라며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다. 큰 성장을 위해 산업의 토양을 새롭게 다지는 분갈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뮤지컬 ‘위키드’ [에스앤코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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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의 개발 시스템을 벤치마킹해 한국형 ‘트라이아웃’ 모델을 만드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하다. 서울에서의 초연 부담을 줄이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지방 주요 도시를 트라이아웃 거점으로 활용하는 방식으로 ‘서울 집중현상’을 해소하는 것이다.
원 교수는 “지방의 도시를 소비가 아닌 인큐베이팅과 트라이아웃 거점으로 활용, 창작자들이 이 안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실패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서울은 ‘설익은 작품’이 아닌 ‘완성된 작품’을 올려 수익을 내며 서울 자체를 제2의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와 같은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는 제언이다.
당장의 성과보다 창작의 씨앗을 뿌리는 시간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 초기 시놉시스 개발부터 리딩, 워크숍 단계까지 지원을 세분화해 창작자들이 꾸준히 도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지 교수는 “무엇보다 창작자의 층이 두터워야 한다”며 “작가, 작곡가는 물론 디자이너, 안무가, 무대 스태프 등 모든 창작자에 대한 존중과 지원이 바탕해야 좋은 창작자가 나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티켓 가격으로 대중의 진입장벽이 높아진 것도 문제다. 하지만 티켓 가격 상승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라는 장르적 특징, 제작비와 인건비 상승 등이 주된 요인이라 제작사에만 모든 부담을 떠넘길 수는 없다.
실제로 뮤지컬은 대극장 기준 한 편당 100~20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들어간다. 브로드웨이에선 350억원에 달한다. 고비용 작품을 올리는 시장이기에 제작사는 모든 위험을 끌어안아야 한다. 그러니 스타 캐스팅에 의존하고, 실험적 작품의 신작보다 안정적인 스테디셀러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업계에선 이에 감세 혜택을 통해 간접비용을 줄이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티켓 가격이 높으니 관객에게 할인율을 적용하는 국가 지원은 근시안적 접근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원 교수는 “뉴욕처럼 뮤지컬을 관광 자원으로 인식해 부가세 감면 등 세제 혜택을 주는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뮤지컬은 크로스 미디어로 원소스가 다양하게 변주돼 부가가치가 창출되는 장르인 만큼 안정적 제작 환경을 조성하면, 다양한 실험과 발칙한 상상력이 작품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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