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학자 앨프레드 로의 도발
"한국성은 박물관 유물 아닌 '수행'의 결과"
"케데헌' 혼종성, '창조적 변주'로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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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콘텐츠의 영토가 확장될수록 '한국다움'을 둘러싼 고민은 오히려 깊어진다. 국경을 넘나드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그동안 고수해온 '순수성'이 과연 여전히 유효한 잣대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한류의 본질을 고정된 원형이 아니라 '혼종성'과 '수행'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학계와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신간 '한류를 읽는 안과 밖의 시선'에 실린 앨프레드 로 영국 옥스퍼드대 언어학·한국학 연구원의 에세이 '한국과 따로, 또 같이 만들어지다'는 이 같은 논의를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작동시켜온 '국가적 정통성'이라는 낡은 검열 장치를 해체하고, 경계를 가로지르는 '초경계적(Trans)' 관점으로 한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작품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다. 글로벌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미국 자본과 제작진이 주도했다는 이유로 서구적 시선에 의해 왜곡됐다는 비판도 동시에 제기됐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러한 문제 제기가 언어와 문화를 고정된 실체로 간주하는 편협한 시각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하며, 대안으로 '트랜스랭귀징(Translanguaging)' 이론을 제시한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스틸 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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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해석에 따르면 영화 속 영어 대사에 섞인 'Hoobaes(후배들)'나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하는 '이태원'은 단순한 번역의 실패가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 자원이 충돌하고 융합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전략적 수행에 가깝다. 후배에 영어 복수형(-s)을 결합해 한국 특유의 위계 문화를 전달하고, 이태원을 유흥의 공간으로 설정해 언어 장벽을 넘어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전략적 혼종성'은 등장인물의 작명 방식과 표기법에서도 두드러진다. 저자는 영화 속 아이돌 그룹 '사자보이즈(Saja Boys)'의 작명에 주목한다. 이는 동물 '사자'와 죽은 이를 인도하는 '저승사자'의 이미지를 동시에 차용한 중의적 표현으로, 한국어의 다의성을 활용해 K팝 특유의 세계관을 구축한 사례다.
로마자 표기법의 규범을 따르지 않은 점도 흥미롭다. 영화는 '후배'를 표준 표기인 'hubae'가 아닌, 글로벌 팬덤 사이에서 통용되는 'hoobae'로 적었다. 해외 팬들이 '언니'를 'unni'로 적는 것처럼, 국가가 정한 어문 규범보다 문화를 실제로 향유하는 수용자들의 관습을 우선시한 것이다. 저자는 이를 두고 "한국 문화가 일방적으로 송출되는 것이 아니라, 팬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재구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해석한다. 이는 K콘텐츠의 '한국성'이 고정된 원본이 아니라, 수용자와 함께 만들어가는 '참여형 정체성'임을 시사한다.
이 같은 관점은 시각적 요소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컵라면의 '매울 신(辛)'자를 '귀신 신(神)'으로 전유해 마법 도구로 활용하거나, 서울 거리의 간판에 한글과 영문을 뒤섞어 배치한 장면은 오리엔탈리즘이 아니라 '트랜스컬처링(Transculturing)'의 결과물로 읽힌다. 현대 한국 사회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다문화적 현실을 반영하면서, 맥락에 맞게 한국 문화를 확장한 '창조적 변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애니메이션은 한국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라기보다, 글로벌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재구성한 결과물에 가깝다. 저자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오래된 명제가 이제는 "세계적으로 수행되는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성은 박물관에 보존된 고정된 유산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형되고 재조립되는 유기체라는 인식이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스틸 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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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다양한 자원을 유연하게 동원해 인간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트랜스랭귀징의 본능과 그 과정에서 문화적 가능성이 상상되고 실현되는 트랜스컬처링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 '한국성'은 글로벌 환경 속에서 희석되는 정적 정체성이 아니라, 복합성과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갱신되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 통찰은 해외에서 제작된 한국 소재 콘텐츠를 바라보는 우리의 이중적 시선에 질문을 던진다. '얼마나 한국적인가'를 감시하는 방어적 태도에서 벗어나, 세계 속에서 변주되고 확장되는 한국성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류의 미래가 원형의 고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확장과 융합에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K콘텐츠의 다음 단계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류를 읽는 안과 밖의 시선 | 안승범 K컬처·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엮음 |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 | 255쪽 | 1만6000원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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