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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24 (화)

    이슈 미술의 세계

    [이 책 어때] 우리는 왜 늘 문턱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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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혜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

    헤매는 시간을 다시 배치하는 에세이

    안정도 도약도 아닌 중간 지대 '문턱 공간'

    섣부른 응원·위로 없이 인생의 '헤매는 시간' 재배치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는 "잘 살자"는 말부터 경계한다. 제주에 정착한 미술치료사이자 생태예술가 정은혜의 이 에세이는 성공담이나 힐링서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목표를 제시하거나 삶의 방향을 단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의 삶을 관통해 온 하나의 반복된 상태를 전면에 놓는다. 헤매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턱 공간(liminal space)'이다.

    아시아경제

    미술치료사이자 생태예술가인 정은혜는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에서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문턱’의 상태야말로 인간이 가장 많은 변화를 축적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불안정한 중간 지대를 실패가 아닌, 감각과 사고가 확장되는 필연적 과정으로 재해석한다. 사진 아라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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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우리는 왜 늘 문턱에 서 있는가'를 묻는다. 캐나다 이민 시절의 우울과 고립, 정신병동과 청소년 쉼터에서의 노동, 제주 숲과 바다로 이어지는 삶의 이동 경로는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수렴된다. 삶은 직선으로 정렬되지 않으며, 계획대로 축적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꼬불꼬불해질수록 감각은 살아나고, 방향을 잃은 순간에 사고는 확장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개인적 체험의 나열이라기보다, 반복적으로 통과해 온 삶의 구조를 관찰한 기록에 가깝다.

    정은혜가 제시하는 핵심 개념은 '문턱'이다.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 안정도 아니고 도약도 아닌 이 중간 지대에서 인간은 가장 불안해진다. 그러나 바로 이 시점에서 사고와 감각은 가장 활발해진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이 시간을 실패나 지체로 규정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반복적으로 찾아오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재배치한다. 멈춘 듯 보이는 시간이 실제로는 가장 많은 변화가 축적되는 구간이라는 관점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지점은 심리학과 예술, 생태적 감각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사유로 엮여 있다는 점이다. 'part x'로 불리는 내면의 적, 결핍과 습관, 불안과 통제의 문제를 개인의 성격이나 의지의 결함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관계와 환경, 반복된 조건 속에서 형성된 구조임을 짚는다. 제시되는 해법 역시 극복이나 제거가 아니라 '달래기'와 '함께 살아가기'에 가깝다. 이는 치료실 안에서만 유효한 언어라기보다, 성과와 자기관리의 압력이 일상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다수의 독자에게 그대로 확장되는 질문이다.

    정은혜의 시선은 인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숲과 바다, 산호와 플라스틱 알갱이까지 그의 사유는 '생태적 자아'로 확장된다. 자연과 연결된다고 해서 개인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고통의 크기와 위치가 달라진다. 반복해서 언급하는 '우주적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이라는 표현은, 문제를 축소하거나 외면하자는 제안이 아니다. 그것을 다른 스케일로 재배치함으로써 다시 감당 가능한 상태로 돌려놓자는 요청에 가깝다. 이 책이 말하는 회복은 감정의 봉합이 아니라, 인식의 전환에서 발생한다.

    행복에 대한 관점도 단호하다. 존재하지도 않는 '10의 행복'을 목표로 삼느라 현재를 유예하지 말라는 주장, 7의 행복이면 충분하다는 통계적·체험적 논증은 자극적이지 않지만 설득력이 있다. 기쁨과 만족을 구분하고, 안정과 자유를 '답답함과 불안' 중 어떤 괴로움을 감당할 것인가의 문제로 치환하는 대목에서는, 이 책이 위로를 건네기보다 독자의 사고를 요구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다. 삶의 선택을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다시 보게 만드는 지점이다.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는 독자를 응원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의 현재를 섣불리 규정하지 않는다. 지금이 나쁜 날인지, 실패의 구간인지 판단을 유예한 채 "이 또한 문턱일 수 있다"는 가능성만 남긴다. 이 책의 미덕은 위로가 아니라 거리다. 그 거리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한 발 떨어져 다시 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비로소, 오늘을 '나의 좋은 날'로 부를 수 있을지 스스로 묻게 한다.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 | 정은혜 | 아라의 정원 | 324쪽 | 1만9800원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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