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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06 (금)

    ‘폭행 사건’ 그 후, 달라진 거장의 큰 손이 가른 구원과 부활 [고승희의 리와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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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 만에 내한 존 엘리엇 가디너

    음악 동반자 컨스텔레이션과의 대화

    시대악기로 되살린 바흐와 모차르트

    헤럴드경제

    22년 만에 내한한 시대 연주 거장 존 엘리엇 가디너 [StudioGu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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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현과 목재 트라베르소의 숨결은 인간의 성대와 닮았다. 맑고 단단한 소리는 경건하게 이어졌다. 끊김 없는 긴 호흡이 만들어낸 소박한 음성들, 그 안으로 역동적인 강약 조절이 담겼다. 극적인 긴장감은 음표와 음표 사이로 자연스레 묻어났다.

    그러다 ‘글로리아’의 네 번째 곡 ‘주 하나님(Domine Deus)’에 접어들 때였다. 두 대의 플루트가 짧은 시차로 주고받는 카논에서 콘서트홀의 공기가 목재 악기의 따뜻함에 섞여 서로를 감싸 안았다. 나지막히 연주하는 바이올린 사이에서 에덴동산을 노니는 작은 새처럼 지저귀는 오브리가토(Obbligato, 독창자가 노래할 때 중요한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 이후, 유달리 인상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오브리가토를 마무리하며 자이에 앉아야 할 두 플루티스트는 연주를 이어가느라 차마 무릎을 굽히지 못했다. 존 엘리엇 가디너는 이들에게 재차 앉으라는 신호를 줬지만, 합창단이 일어선 순간에도 연주자들의 음악은 멈출 수 없었다. 사실 이유가 있었다. 보면대의 높이 탓에 연주자들은 쉽사리 의자에 앉지 못했다. 그러자 80대의 거장은 플루트 수석 라셸 베켓의 악보대를 직접 내려주며 음악을 이어갔다. 가디너가 1978년 창단한 잉글리시 바로크 솔로이스트 시절부터 호흡을 맞췄고, 1980년대 바흐 녹음은 물론 2000년 ‘바흐 칸타타 순례’를 함께 해온 ‘동지’를 향한 배려와 예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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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 만에 내한한 시대 연주 거장 존 엘리엇 가디너와 그가 2024년 창단한 컨스텔레이션 합창단, 오케스트라 [StudioGu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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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 만에 한국을 찾은 존 엘리엇 가디너(83)는 풍문과 해외 언론의 보도로만 접하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몇 해 전, 클래식 음악계를 발칵 뒤집은 사건이 있었다. 2023년, 무대 뒤에서 젊은 성악가를 가디너가 폭행한 사건이었다. 프랑스에서 열렸던 공연에서였다. 오페라 2막이 끝난 뒤 무대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퇴장한 20대 성악가의 얼굴을 손찌검했다. 사건 이후 가디너는 사과 성명을 내고 공연에서 하차했다.

    영국 몬테베르디 합창단·오케스트라 이사회는 성명을 통해 “악단은 피해자를 보호할 책임을 지고, 사건 재발 방지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라며 가디너와의 결별을 알렸다. 이 단체 역시 가디너가 1964년 창단했다. 가디너는 “후회스러운 사건이 발생한 뒤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는 성명으로 퇴출을 인정했다. 그 여파로 2024년 가디너가 이끄는 혁명과 낭만 오케스트라의 내한도 줄줄이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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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 만에 내한한 시대 연주 거장 존 엘리엇 가디너[StudioGu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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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기획사 프로세토 아트가 성사시킨 공연은 이날의 사건 이후 성사된 만남이다. 가디너가 2024년 새롭게 창단한 컨스텔레이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첫 아시아 투어였다.

    거장의 걸음엔 활력이 담겨 있었으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무대로 걸어나와 관객을 마주했다. ‘완벽주의’와 ‘카리스마’, ‘폭행 사건’이라는 불명예 얼룩까지 더해진 백전노장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음악으로 조율했다. 지휘봉 없이 연주하는 그의 큰 손은 음악적 공기를 섬세하게 조각하고 단원을 보듬는 지지대였다.

    이틀간 이어진 한국 공연에선 첫날엔 바흐 B단조 미사를, 둘째 날엔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와 ‘레퀴엠’을 들려줬다. 역사주의 연주(당대의 악기로 당대의 연주 방식을 복원하고 재현하는 것)에 헌신해온 가디너의 ‘음악적 유훈’과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이번에 함께 온 컨스텔레이션과의 음악 소통은 더 특별하다. 가디너는 폭행 사건 이후 자신의 고향인 스프링헤드의 부지 이름을 딴 ‘스프링헤드 컨스텔레이션(Springhead Constellation)’이라는 예술 기구를 설립하고, 산하에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가디너의 연인인 하피스트 그위네스 웬팅크가 CEO를 맡은 단체다. 멤버들의 조합이 흥미롭다. 이미 가디너와 수십 년간 호흡을 맞춰온 ‘가디너 사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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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 만에 내한한 시대 연주 거장 존 엘리엇 가디너 [StudioGu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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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오는 주홍글씨처럼 새겨졌지만, 사실 가디너가 몬테베르디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떠날 때 이미 100여명의 연주자들이 그의 복귀를 지지하는 서한을 보냈을 만큼 이들간의 유대가 깊었다. 컨스텔레이션에도 가디너의 음악적 문법을 가장 잘 이해하는 베테랑들이 대거 합류했다. 가디너의 악단을 이끌어온 악장 카티 데브레체니, 수석 오보이스트 미하엘 니제만, 수석 비올리스트 파니 파쿠는 물론 가디너가 직접 발굴한 테너 조나단 헨리, 카운터 테너 레지널드 모블리가 함께 했다.

    새로운 시작인 이 단체에 대해 가디너는 “고정된 오케스트라의 틀을 벗어나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가장 적합한 예술가들이 모이는 유연하고 창의적인 조직을 지향한다”고 했다.

    이틀간의 연주에서도 컨스텔레이션은 하나 하나의 별들이 모인 별자리처럼 응집된 아름다움을 만들면서도, 저마다의 별로 밝게 빛났다. 그 과정은 ‘완벽’을 넘어 ‘완성된 바흐’에 이르는 길이었다. 연대하는 공동체의 음악이 무대 위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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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엘리엇 가디너와 컨스텔레이션 단원들 [StudioGut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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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대목에선 침묵보다 깊은 소리가 들렸다. 바소 콘티누오의 하행 반음계적 선율을 억누르고, 합창단은 피아니시모로 가만히 입술을 벌려 노래했다. 극도의 고통을 마주한 인간의 내면에 드리운 공포를 경건하게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부활하셨도다’에선 가디너의 손끝이 리듬의 중추 역할을 하며 공기를 흔들었다. 소프라노가 두 파트로 나뉘어 주고 받는 등 촘촘하게 엮어진 5성부 합창에선 텍스처가 뭉치지 않고 펼쳐져 영적인 음악이 만들어졌다.

    가디너의 인생 역작으로 꼽히는 바흐 B단조 미사는 과거의 날카로운 연주, 빠른 호흡을 내려놓고 오래도록 숙성한 자연스러운 음악으로 관객과 만났다. 밸브가 없는 트럼펫과 호른, 턱받침이 없어 어깨에 대고 연주하는 거트현의 바이올린과 비올라, 받침발(엔드핀)이 얻는 첼로가 만들어내는 투명하고 따뜻한 음색은 탁월한 조화를 이루면서도 각각의 악기가 층층이 쌓여 각자의 존재감을 냈다. 이들 악기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과정에선 여전히 정교한 가디너의 한 칼을 체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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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 만에 내한한 시대 연주 거장 존 엘리엇 가디너와 그가 2024년 창단한 컨스텔레이션 합창단, 오케스트라 [StudioGu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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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미롭게도 가디너의 바흐 B단조 미사는 ‘보는 재미’도 있었다. 합창단에서 독창자들이 무대 앞으로 나와 독창을 하고, 악기들이 오브리가토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연주하는 모습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별처럼 빛나는 순간이었다. 3부에선 합창단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져 좌우로 층을 이룬 대형의 합창 장면을 보고 들을 수 있도록 연출했다. 인터미션도 없이 이어졌지만, 120분의 마라톤이 남긴 심장박동은 쉽사리 멎지 않았다.

    첫날의 영적 체험은 둘째날 공연의 모차르트 C단조 미사와 레퀴엠으로 이어졌다. 모차르트의 종교음악은 가디너를 만나 드라마틱한 인간 서사가 됐다. 시대악기 특유의 담백하고 투명한 질감은 복잡한 대위법 속에서도 각 성부의 존재감을 유리알처럼 드러냈다.

    가디너는 때때로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움직였고, 단원들은 가디너와 시선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이들은 엄격한 고음악 오케스트라 안에 놓인 통제 받는 연주자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음악성이 비집고 나오는 ‘유희하는 앙상블’이었다. 바람을 가르는 듯한 가디너의 두 손은 단원들의 영적인 순간을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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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년 만에 내한한 시대 연주 거장 존 엘리엇 가디너 [StudioGut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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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차르트 C단조 미사에서 소프라노와 세 대의 목관이 4중주처럼 얽히는 오브리가토는 압권이었다. 레네케 루이텐은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 신앙 고백을 이어갔다. 그의 모습 자체가 마리아였다. 성악가들의 독창과 악기의 독주 부분에서 단원들이 취하는 태도 역시 흥미로웠다. 단원들의 시선은 악보가 아닌 독주자를 향해 있었다. 눈빛은 경외로 채워졌다. 이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와 존중이 보이는 대목이었다.

    바셋 호른과 바순이 엮어내는 죽음의 문턱에서 시작되는 ‘레퀴엠’은 그 어떤 레퀴엠보다 담담하고 담백했다. 그는은 죽음의 강물을 고요히 유영했다. 과잉된 감정이나 비장미를 걷어내고 성스러운 대화로 서로를 다독이는 시간이었다. 가디너의 큰 손이 만들어내는 음악의 바람은 마침내 ‘영원한 안식과 빛’으로 내려앉아 지친 영혼들의 묵은 먼지를 씻어냈다. 거장 지휘자의 속죄와 부활이 동시에 이뤄진 날이었다.

    이틀간의 공연에 관객은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22년 만에 찾은 한국에서 그는 뜨거운 환영과 존경의 박수를 받으며 음악의 끈으로 연결된 동료들과 함께 몇 번이나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다음 만남도 예고했다. 연주를 마친 뒤 미사곡과 레퀴엠의 가사가 적힌 화면엔 가디너의 2027년 ‘베토벤 사이클’ 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이틀간 이어진 명연을 만난 관객들은 가디너와의 내일을 기대하며 공연장을 나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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