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08 (일)

    우리는 다시 찬란한 장면을 마주하리라 … 경칩에 읽는 '봄은 또 오고' [그림책 권하는 언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김이현 방송작가 칼럼니스트]
    이코노믹리뷰

    ※김이현은 방송작가로 20년 넘게 말과 글 사이를 오가다, 우연히 다시 펼친 그림책에서 위로와 질문을 동시에 발견했다. 현재 마포FM(100.7MHz)에서 그림책을 소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그림책 권하는 언니’를 만들고 직접 진행하고 있다. ER 이코노믹리뷰 연재 칼럼 ‘그림책 권하는 언니’에서는 누구나 펼치면 위로 받는 그림책을 추천한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코노믹리뷰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코노믹리뷰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3월 5일은 경칩(驚蟄)입니다.

    경칩은 흔히 "천둥소리에 놀란 벌레가 땅 밖으로 나온다"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이 절기의 본래 이름은 '열 계(啓)' 자를 쓴 계칩(啓蟄)이었다고 합니다. 한경제(漢景帝, BC 188~BC 141)의 본명에 들어간 '열 계(啓)' 자를 피하기 위해 '놀랄 경(驚)' 자로 바꾼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죠.

    경칩의 어원을 찾다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봄은 밖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에 떠밀려 마지못해 깨어나는 계절인가, 아니면 안에서부터 차오른 기운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는 계절인가.

    그 질문을 품고 펼친 그림책, 아드리앵 파를랑주의 『봄은 또 오고』입니다.

    ■ 모든 봄은 다르고, 그래서 매번 새롭다

    표지를 보면 따스한 노란 바탕 속에 한 아이가 웅크리고 있습니다. 봄 햇살처럼 온화한 배경 위에서 깊게 잠든 아기의 모습은 세상의 모든 평화와 안녕을 한 장면에 응축해 놓은 듯합니다.

    "태어나서 두 살까지는 아무런 기억이 없어." 담담한 고백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세 살의 봄, 파도 거품 속에서 첫걸음마를 떼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네 살엔 아버지가 따준 산딸기의 맛을 배우고, 다섯 살엔 뱀을 만나 혼비백산 도망치기도 합니다.

    가족과 추억이 가득한 유년의 봄을 지나 친구가 세상의 전부이던 학창 시절, 반항기 가득한 사춘기의 봄이 겹겹이 쌓여갑니다.

    열다섯의 봄에는 첫 입맞춤의 서툰 떨림이 있고, 스물여섯의 봄에는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며, 때로는 홀로 긴 여행을 떠나는 청춘의 객기도 부려봅니다.

    어느덧 부모가 된 주인공은 자신의 아이에게 새로운 봄의 여정을 선물하기도 하죠.

    그림책 속 주인공은 생애 동안 여든다섯 번의 봄을 맞이하지만, 그중 어느 하나 같은 봄은 없습니다. 지난해의 나와 올해의 내가 엄연히 다르듯, 계절 또한 매번 새로운 얼굴로 당도하기 때문입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유난히 눈길이 오래 머무는 봄이 있을 겁니다. 어떤 시절, 어떤 장면에서 마음을 뺏길지, 그건 오롯이 읽는 사람의 몫입니다.

    ■ 타공으로 쌓아올린 기억의 지층, 비워진 공간이 채우는 삶의 이야기

    아드리앵 파를랑주는 책의 물성을 영리하고 기발하게 활용하는 작가입니다. 이 그림책 역시 처음 두 페이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면에 마름모나 세모 꼴의 타공(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보드북 내지에 뚫린 이 구멍들은 시각적 효과를 넘어, 기억의 물리적 연결성을 시각화합니다. 절묘하게 계산된 타공은 앞장의 이미지와 다음 이야기를 연결하는 고리가 되어, 과거와 현재를 한 화면 안에 중첩시킵니다.

    그 연결 방식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세 살 때 첫걸음마를 떼던 아기의 연약한 다리는 서른여섯 살의 봄, 딸에게 걸음마를 가르치는 아빠의 다리와 절묘하게 포개집니다.

    네 살 때 아버지가 맛보여준 산딸기의 달콤함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책의 타공을 관통하며 생의 근원적인 위로가 됩니다.

    다섯 살에 뱀을 보며 느꼈던 공포가 훗날 아이와 맞잡은 든든한 손으로 치유되는 과정이나, 아빠 손을 꼭 쥐던 어린 딸이 자라 나이 든 아버지를 부축하는 장면은 글 한 줄 없이도 묵직한 감동을 전합니다.

    작가는 종이에 구멍을 내어 공간을 비워냄으로써 서사를 더욱 빈틈없이 완성합니다. 어쩌면 기억이란, 그리고 우리의 삶이란, 본디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걷는 길 위에 오래전 장면이 불현듯 겹쳐 떠오르고, 어제의 상처가 오늘의 평안으로 탄탄하게 연결되는 것. 이 그림책 속의 타공(구멍)은 지워진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떠받치는 기억의 지층이자, 현재의 나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 봄은 또 오고... '또'라는 글자가 건네는 다정한 약속

    이 책의 프랑스어 원제는 'Les Printemps', 복수형입니다. 봄이 아니라, '봄들'.

    번역자가 제목 후보를 여럿 냈다고 하는데, 편집자가 '봄은 또 오고'를 골랐다고 합니다.

    제목을 소리 내어 읽어봅니다. "봄은 또 오고". 그 선택이 탁월합니다. '또'라는 부사에는 반복의 허무함이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는 강인한 생명력이 가득하니까요. 지난봄이 아무리 시리고 춥고 고통스러웠어도 봄은 '또' 옵니다. 시작이 서툴렀어도, 다시 시작할 기회는 '또' 찾아옵니다.

    ■ 당신의 봄이 마침내 당도하기를

    책의 마지막, 여든을 훌쩍 넘긴 화자는 말합니다. "여든다섯의 봄, 지금껏 이렇게 봄을 사랑한 적은 없었어."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아지고 익숙했던 것들이 사라져가도, 들판과 나뭇가지 사이에는 여전히 새로운 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걸음마마저 서툴렀던 봄, 사랑이 끝나 아팠던 봄, 청춘의 패기로 도망치듯 보냈던 봄까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계절을 맞이했든 봄은 기어이 찾아오고, 그 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룹니다.

    다시, 표지를 봅니다. 노란빛 속에 웅크린 아기는 이제 단순한 신생아로 보이지 않습니다. 앞으로 수많은 봄을 통과하며 겹겹이 기억의 지문을 쌓아갈 장대한 여정의 첫 페이지니까요.

    혹시 지금 새로운 시작 앞에서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지시나요? 이 봄이 우리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어떤 시간과 이어질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봄은 또 올 것이고, 우리는 다시 찬란한 장면을 마주하리라는 사실입니다. 켜켜이 쌓여갈 당신 삶의 다음 장을, 설레는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저작권자 Copyright ⓒ ER 이코노믹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