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수감 중 사망한 미국 억만장자 성착취범 제프리 엡스타인이 금융·법조·언론·정치 전반에 걸쳐 뻗친 영향력을 완전히 밝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범죄를 폭로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싸운 생존자의 소상한 기록은 이미 독자 앞에 공개됐다.
책 ‘노바디스 걸’은 엡스타인 사건의 핵심 증인인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가 사망한 지 6개월 뒤 공개된 사후 출간 회고록이다. 저자는 지난해 4월 호주 외딴 농장에서 마흔한 살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버지니아 로버츠 주프레/김나연 옮김/은행나무/2만7000원 |
책은 저자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1983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7세에서 11세 사이 친부와 그 친구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썼다. 이 친구는 이후 다른 미성년자 학대 혐의로 복역했으며, 저자의 어머니는 이를 알고도 방임했다고 한다.
2000년, 플로리다 팜비치의 트럼프 소유 사설 클럽 마러라고에서 스파 직원으로 일하던 저자는 엡스타인의 공범이자 사교계 유력 인사인 길레인 맥스웰을 만난다. ‘전문 마사지사로 키워주겠다’는 맥스웰의 유혹에 엡스타인 저택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성적 착취를 경험한다.
이후 약 2년 반 동안 저자는 엡스타인과 그의 영향력 있는 지인들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며, 엡스타인 전용기를 타고 전 세계를 오갔다고 기록했다. 영국 전 왕자 앤드루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전직 총리 등 유력 인사들에게 당한 성폭력에 대해 상세히 썼다.
2002년, 저자는 엡스타인과 맥스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가정을 꾸렸지만 5년 뒤 맥스웰로부터 악몽 같은 전화를 받는다. 엡스타인이 수사 대상이 되었으니 침묵을 지키라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2009년 엡스타인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2011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앤드루 왕자의 성착취를 포함한 사건 전말을 폭로했다. 이후 저자는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며 갖은 모욕과 살해 협박에 시달렸지만, 그의 활동은 엡스타인의 실체를 드러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엡스타인은 결국 감옥에서 죽었고 공범 맥스웰도 수감됐다. 그러나 저자는 경고한다. “엡스타인은 사라졌지만, 그가 마음 놓고 괴물이 될 수 있었던 토양은 여전히 비옥하다. … 소수의 상징적인 사건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가 치유된 것은 아니다. … 이러한 사회 분위기 탓에 포식자가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도 많은 이들이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책 출간을 위해 저자와 수년간 협업한 에디터 에이미 월리스는 서문에서 저자의 마지막 몇 달을 전한다. 남편에게 지속적인 가정폭력을 당하고 자녀 양육권 분쟁을 겪던 저자는 지난해 4월1일 에디터에게 보낸 메일에서 “이 책은 제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반드시 출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며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이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는 사회 시스템의 결함을 밝히고 싶다”고 썼다. 3주 뒤, 그는 세 아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