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럴당 90달러대 돌파 시 수익성 빠르게 악화
중동산 중질유 대체 어려워…동남아산 가격 ↑
비축유 풀면 시장에 '위기 시그널'…물량 확보 시급
황진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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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에 중동이 격랑에 휩싸이면서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 석유화학 업계에 위기가 가중되고 있다.
중동산 원유 수입 의존도가 큰 것도 문제지만 국내 석유화학의 플랜트가 '중질유'에 특화되어 있어서 중동산 이외의 대체 물량을 찾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원료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제품 공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음을 고객사에 통보한 사례도 나왔다.
상황이 악화하자 정부와 여당도 민간 보유 원유 재고분을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비축유 수급 계획 마련에도 나섰다.
배럴당 80달러대…석화 원료 수급 차질에 첫 '공급 불가항력' 선언까지
7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국제 유가 기준인 브렌트유 가격은 80달러 대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원유 수입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할 때마다 에너지 가격과 공급 리스크가 동시에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업계에서는 1·2차 오일쇼크 때처럼 배럴당 100달러를 크게 웃도는 수준은 아니지만, 90달러대에 진입하면 수익성이 빠르게 악화되기 시작한다고 보고 있다.
더욱이 이란 폭격 이전과 대비해 국제 유가가 약 20%가량 오르면서 나프타(납사) 가격 상승도 불가피해졌다. 나프타는 석유화학 제품의 핵심 원료로, 에틸렌·프로필렌 등 기초유분을 생산하는 나프타분해설비(NCC)의 주원료다.
나프타 가격이 빠르게 오르면 에틸렌 등 기초유분 가격과의 스프레드(마진)가 급격히 줄어든다. 에틸렌 스프레드는 이란 폭격 이후 톤당 약 200달러 안팎 수준까지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통상 손익분기점으로 여겨지는 300달러 수준을 크게 밑도는 수치다. 여기에 원료 가격까지 상승하면 국내 석화업계의 수익성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더 큰 문제는 나프타 수급 자체에 '빨간불'이 켜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에틸렌 등 석유화학 기초소재 제조사인 여천NCC가 나프타 수급 차질 등을 이유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주요 고객사들에게 제품 공급 이행 지연 등을 통보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업계 불안이 가중되는 기류다.
석화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여천NCC는 지난 4일 주요 고객사들에 제품 공급 이행 지연 및 조정을 통보하고 공급 불가항력을 선언했다. 공급 불가항력이란 통제 불가능한 외부 요인으로 제품 계약의 정상적 이행이 어려울 때 책임을 면제 받기 위해 하는 조치다.
여천 NCC가 이 같은 조치를 취한 건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3월 인도 예정이었던 나프타 도착마저 지연되는 등 원료 수급에 심각한 어려움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2공장의 가동률을 최소한으로 낮추는 방안도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장기화 되면 유사 사례가 확산할 수 있다는 관측도 일각에서 나온다.
중동산 중질유밖에 못 쓰는데…원유 확보 못하면 4월부터 '비상'
이런 원료 수급 차질에 더해 국내 정유·석화 산업의 설비 구조도 위기를 키우는 요인이다.국내 정유·석화 플랜트는 대부분 중동산 중질유를 처리하는 구조로 설계돼 있어 미국이나 북해 등에서 생산되는 경질유로 쉽게 대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 업체들은 점도가 높고 무거운 성분이 많은 중질유를 고온·고압에서 분해해 휘발유와 나프타 등을 생산하는 '고도화 설비'를 통해 그동안 수익성을 높여 왔다. 값싼 중질유를 활용해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중동 지역에서 공급 차질이 발생하면 오히려 취약성이 드러나는 구조다.
설비 구조를 바꾸는 것도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수조 원 규모의 투자가 필요한 데다 최근 정부가 탈탄소 정책을 강화하면서 석유화학 설비에 대한 대규모 신규 투자가 사실상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국내 석화 업계는 그동안 러시아에서 일부 원유를 수입해 중동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왔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오히려 중동 의존도는 심화된 상태다.
가격이 다소 상승하더라도 원유 물량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유일한 대응책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민간 정유사들의 원유 재고가 이달 말까지 버틸 수 있는 수준으로 알려지면서, 추가 물량 확보가 늦어질 경우 4월부터 생산 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도 원유 수급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정책위의장은 지난 5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정부는 에너지 수급 및 가격 동향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필요하면 비축유를 반출하되 어느 시점에 어느 정도로 방출할 것인지 정확한 수급 계획을 마련해 달라"며 "우선 민간이 보유하는 원유 재고분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만 비축유 방출은 극히 이례적으로 시행돼 왔다. 비축유 방출은 시장에 '공급 위기' 신호를 줄 수 있어 실제로도 역대 다섯 차례 정도만 제한적으로 사용됐다. 걸프전(1991년), 허리케인 카트리나(2005년), 리비아 사태(2011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2022년) 등 글로벌 에너지 공급 위기가 발생했을 때만 예외적으로 활용된 조치다.
이에 한국석유공사는 원유 200만 배럴을 추가 확보했다. 석유공사는 현재 울산·거제·여수 등 전국 9개 석유 비축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2월 말 기준 총 1억 4600만 배럴 규모의 저장 시설 가운데 약 1억 배럴의 비축유가 저장돼 있다. 이번에 확보한 200만 배럴은 정부 비축유의 약 2% 수준으로, 단기적인 수급 불안에 대응하기 위한 추가 물량이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중질유를 찾기 어렵고 동남아시아 중질유는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다"며 "정부·민간 비축유를 합치면 문제 없다고들 얘기하지만 (비축유를 쉽게 풀 수 없으니) 4월이 되면 상황이 굉장히 어려워질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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