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영상의 실체는 2015년 중국 톈진 화학 창고 폭발 모습. 50명 이상이 숨진 10년 전 사고가, 이란·이스라엘 전쟁 개전 첫날 '이란의 승리 증거'로 둔갑해 SNS를 떠돌았다.
같은 날 이란 군사기지 공격 영상도 퍼졌다. 팩트 체크 기관 풀팩트(Full Fact)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4개 클립 중 3개가 AI 합성이었다.
가짜가 먼저 도착하고 진실은 뒤늦게 따라온다. 그 사이 수백만 명의 인식이 바뀌어 있다.
하민회 이미지21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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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을 이해하려면 두 단어가 필요하다.
첫째는 '슬롭(slop)'. 원래는 가축 사료인 꿀꿀이죽을 이르는 말이었지만 미국 사전 출판사 메리엄-웹스터가 2025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며 공식 정의를 내렸다. "AI를 활용해 대량 생산된 저 품질 디지털 콘텐츠." 자극적인 썸네일로 클릭을 유도하지만 내용은 공허한 영상, 사실 확인 없이 쏟아지는 AI 전자책, 유명인을 합성한 가짜 광고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둘째는 '슬로파간다(Slopaganda)'다. 슬롭과 프로파간다의 합성어로, 네덜란드 틸버그대학 연구팀이 2025년 학술지에 발표한 개념이다. 'AI 슬롭이 단순히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것을 넘어, 집단의 의사결정 능력 자체를 훼손한다는 것.' 정보 환경을 장악하는 자가 판을 장악한다는 말. 이미 전쟁터에서 이 구도는 현실이다.
챗GPT와 오픈AI 일러스트 이미지 [사진=로이터 뉴스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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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씁쓸한 사실 한 가지에 직면한다. 슬롭의 파도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이 밀려드는 곳이 바로 한국이라는 점. 영상 편집 플랫폼 캡윙(Kapwing) 분석에 따르면, 한국 기반 AI 슬롭 채널의 누적 조회수는 84억 5,000만 회로 세계 1위다. 2위 파키스탄(53억 회), 3위 미국(33억 회)을 압도한다. 인구 5,000만의 나라가 인구 3억의 미국보다 AI 찌꺼기를 2.5배 더 소비, 유통하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인의 월평균 유튜브 이용 시간은 40시간, 글로벌 평균인 23시간을 크게 웃돈다. 쇼츠의 자동 재생 알고리즘은 이용자 의사와는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슬롭을 밀어 넣는다. 신규 계정에 추천되는 쇼츠 5개 중 1개가 이미 AI 슬롭으로 분류된다.
여기에 'AI 부업' 열풍까지 가세했다. "하루 1시간 투자하면 월 300만 원 수입"이라는 강의가 넘쳐난다. 오픈AI에 의하면 영상 생성 AI '소라'의 사용량 세계 1위 도시가 서울이다. 만들기도, 보기도 세계 1위인 셈이다.
[사진 = 자장커 웨이보] 2월 16일 중국 영화감독 자장커(賈樟柯)는 자신의 웨이보에 시댄스2.0을 활용해 제작한 5분 31초 분량의 동영상을 공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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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슬롭의 폐해에 가장 깊이 잠기는 층이 청소년과 청년이라는 점이다. 유튜브 쇼츠와 틱톡은 이 세대의 사실상 주요 정보 창구다. 하버드 가제트가 2025년 11월 교수진 인터뷰를 통해 정리한 바에 따르면, AI가 대신 생각해주는 상황에 익숙해질수록 인간의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성이 침식된다. 전문가들은 아직 인지 체계가 형성 중인 청소년기에 의존성이 굳어지면 되돌리기 어렵다고 경고한다.
불편한 진실은 또 있다. 슬롭을 만드는 많은 이들이 이념보다 수익을 먼저 계산한다. BBC 취재에서 한 AI 전쟁 영상 제작자는 "알고리즘을 한번 타면 바이럴 AI 영상은 사실상 돈 찍어 내는 기계다." 라고 털어놓는다. 업계의 한 추산에 의하면 슬롭 채널 278개의 연간 광고 수익이 1,690억 원에 달한다.
슬롭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공공의 정보 환경을 오염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윤리적 감각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플랫폼도 AI 슬롭 대응에 나섰다. 2026년 1월 유튜브는 연간 수익 147억 원에 달하던 슬롭 채널 16곳을 한꺼번에 삭제했다. 2025년 7월부터 AI 양산 영상의 수익 창출을 금지한 것에 따른 후속 조치였다.
그러나 제재 기준이 불투명하고, 워터마크를 지우는 기술은 날로 정교해지고 있다. 유튜브의 채널 삭제 과정에서는 슬롭으로 오탐되어 AI를 창의적 도구로 활용하는 진짜 창작자까지 피해를 입는 사례가 속출했다. 한국에서도 구독자 수십만의 연예인 채널이 이유도 통보받지 못한 채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수업 중 스마트기기 사용 금지 일러트스. [사진=챗GPT 생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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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터마크 제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수익 구조가 살아 있는 한 제재를 피한 새로운 형태의 슬롭은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정부는 이미 예고한 AI 콘텐츠 표시 의무제와 허위 정보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서둘러 입법화해야 한다. 특히 전쟁·재난처럼 사회적 영향이 큰 상황에서 유포되는 슬로파간다는 별도의 엄격한 기준으로 다루어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있다. 바로 교육이다. 마지막 방어선은 결국 개인의 판단력이다.
알고리즘이 밀어주는 영상을 보기 전에 한 박자 멈추는 습관, 충격적인 영상일수록 출처를 확인하는 의지, AI 생성 여부를 의심하는 감각, 떡상 수익만 보고 AI 슬롭 양산에 뛰어들지 않는 윤리성.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청소년기에 이 태도를 형성하지 못하면, 판단력이 가장 유연한 시기에 슬롭이 가장 깊이 파고든다.
AI 슬롭은 찌꺼기다. 그러나 그 찌꺼기가 쌓이면 진흙이 되고, 진흙이 굳으면 판단의 발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AI 찌꺼기를 소비하는 나라에서, 지금 가장 시급히 던져야 할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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