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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17 (화)

    가해의 관점을 경유하는 역사 '튤립'[엄현희의 생각하는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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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낸셜뉴스

    18회 창작산실 '튤립' 공연 사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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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이낸셜뉴스] 이 작품은 뿌리에 대한 은유처럼 읽히기도 한다. 구근식물로 삼은 제목이 암시하듯, 그것은 기원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중 공연된 연극 '튤립'(김도영 작/전인철 연출) 이야기다.

    '튤립'은 전형적인 가정 비극이다. 한 가정을 배경으로 가족 관계의 비밀이 폭로되며 파국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다만 이 연극은 일제강점기 시공간 속 어느 일본인 가정을 들여다본다. 아버지는 군인이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다니는 이로서, 극중 대사로 드러나듯 조선을 멸시하고 수탈하는데 거리낌 없던 일본인이었으며, 어머니는 가부장제 아내로서 그의 피해자로 여겨지지만 식민지 조선을 대하는 태도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동안의 많은 무대는 식민지 조선을 그릴 때 관객이 동일시하기 쉬운 피해의 입장, 즉 조선인의 시선과 관점으로 접근했다. '튤립'은 여기서 비껴서 일제강점기의 가해자의 관점을 풀어놓는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무대는 감정이입이 아닌 거리를 두고 바라보도록 연출돼 있다. 또한 전혀 경험해 보지 않은 근대의 시공간과 선 위치가 다른 곳에서의 서술을 촘촘하게 이뤄낸 상상력이 무대를 특별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단순하며 선 굵게 구성된 연극은 ‘가해자의 위치에 선 착취와 대상화는 어떠한 질문을 남길 수 있는가?’를 향해 달려간다.

    무대는 시각적으로도 불온하며 불길한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검은색 페인트로 번들거리게 광나도록 마감된 벽체가 견고한 사각 틀로 꾸며졌다. 이곳은 인위적이며 생명이 숨 쉬지 못하는 공간이다. 어머니는 더없이 아름다운 자신의 집 마당에서 목을 매는 망상에 시달린다. 다만 천장까지 막혀 조명을 단조롭게 사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배우들 소리가 벽에 묻히는 경우들이 있어 실용성을 고민하게 만들기도 한다.

    '튤립'은 아들이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학교의 관리인을 집으로 초대하고, 그가 아이의 진짜 아버지임이 밝혀지는 구성이다. 화려하고 신식이며 섬세한 일본인 가정에 초대된, 과거 만주에서 일본인 군인에 의해 얼굴에 까맣게 페인트가 칠해진 그는 흉한 불청객이자 집을 망가뜨릴 수 있는 비밀을 간직한 이다. 하지만 이 집은 그의 아내를 죽이고 그에게서 뺏은 아이와 함께 세운 곳이며, 그래서 무대 안 부서지는 꽃잎들처럼 덧없는 영화로 사그라질 수 있는 곳이다. 이 집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역시 위태로움 앞에 선 일본인 가정을 드러낸다. 사실 이러한 의미가 층층이 쌓일 수 있는 점도 일본의 전쟁 패망이란 역사를 관객들이 이미 알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무대에서 봐야 하는 이유를 작품이 드러내는 셈이다.

    배우들은 연극 '튤립'을 살아 있게 만드는 큰 동력이다. 특히 검은 페인트로 칠해진 얼굴을 한 진짜 아버지(권정훈 역)는 부드럽고 좌절해 있으며 그럼에도 견뎌 나가는 인물을 정확한 호흡과 풍부한 존재감으로 드러낸다. 아마 연극의 제목 ‘튤립’은 잃어버렸던 아들이 그를 향해 갖는 본능적 끌림과 애정을 ‘뿌리’란 이미지로 만들어 낸 것이리라. 하지만 아들은 자신의 감정의 정체를 착각 속에서 인지하며, 그는 일본인 여성에 의해 독살되고 외롭게 죽는다.

    평생 비극적 삶 속에서 이해받지 못하던 사내는 비로소 튤립이 된 듯, 그의 벗은 나신에 구근식물처럼 흙이 덮인다. 사내에게 다시 생이 허락되기를. 뿌리만 있으면 언제든 살아날 수 있는 튤립이 돼 진짜 환생하기를. '튤립'은 가해가 잔혹하고 파괴적일수록 피해의 시간, 견딤의 시간 또한 계속 이어진다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잊히는 것 대신에 증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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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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