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모어’ 1편
‘맥베스’에 히치콕 스타일 버무려
관객 주도적? 잘 설계된 고가 놀이터
숨 막히는 공포, 합법적 관음증 폭발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Macbeth)를 히치콕 스타일의 ‘누아르 서스펜스’로 재구성한 논버벌(Non-verbal) 퍼포먼스 ‘슬립 노모어’ [미쓰잭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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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지워져라, 사라져라, 저주받은 점이여!”
피 칠갑한 맥베스가 계단을 질주한다. 언어가 표현할 수 없는 극한의 긴장과 고통. 이성을 잃고 던컨왕을 죽이고 만 맥베스의 눈엔 두려움이 가득하다. 아무리 손을 씻어도 핏물이 잦아들지 않는다. 욕조에서 전라의 몸을 강박적으로 씻어내는 맥베스 부인의 광기가 어두컴컴한 공간을 메운다. 욕망의 화신을 마주하고 선 관객들의 살갗마저 시뻘겋게 물든다.
이쯤 하면 ‘브리티시 인베이젼’이다. 지난해 8월 시작해 오픈런(폐막일을 정해두지 않고 이어가는 공연)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는 영국의 창작 집단 펀치드렁크의 ‘슬립 노모어(Sleep No More)’(옛 대한극장)다.
이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히치콕 스타일의 ‘누아르 서스펜스’로 재구성한 논버벌(Non-verbal) 퍼포먼스다. 단 한 줄의 대사도 대화도 없지만, 공연은 압도적 몰입감으로 세계 공연계에 충격을 안겼다. 한국에선 250억원의 ‘자본의 힘’을 등에 업고 세계 최대, 최고 규모로 설계돼 국내 ‘공연 마니아’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공간인 ‘맨덜리 바’ [미쓰 잭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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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습격한 글로벌 IP, 죽어가던 대한극장을 되살리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하리라! 맥베스는 잠을 죽여버렸다(Sleep no more! Macbeth does murder sleep).”
한때는 대한민국 영화산업의 심장이었던 충무로의 대한극장. 이곳에 글로벌 메가 IP가 상륙, 폐관된 영화관에 다시 숨결(?)을 불어 넣고 있다.
‘슬립 노모어’는 공연장의 입구에서부터 정교하게 설계된 지도를 따라야 하는 극이다. 출발부터 의도적이다.
육중하고 중후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 칠흑 같은 어둠의 습격. 시야를 완전히 틀어막고 통제하는 암흑이 찾아오자 나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된다. 고작 열 걸음 안팎의 짧은 복도를 걷는 동안 겪게 되는 이질감이 이곳은 다른 세계라고 무언의 대화를 건넨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히치콕 스타일의 ‘누아르 서스펜스’로 재구성한 논버벌 퍼포먼스 ‘슬립 노모어’ [미쓰잭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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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잠시 머물다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서는 10여분은 관객이 ‘슬립 노모어’의 세계관으로 진입하게 하는 준비운동과 같다. 이 시간 동안 관객은 마치 스릴러 누아르 영화를 따라가는 기분이 든다.
‘슬립 노모어’ 의 펠릭스 바렛 연출가는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필름 누아르 스타일은 우연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우리의 모든 작품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도구”라며 “감각을 일부 차단해 인식을 조율하고, 그 속도를 늦추는 방식”이라고 했다. 이 과정을 통해 “전혀 다른 시간과 장소로 이동하게 되고, 어느 순간 공연의 세계에 진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바렛 연출가는 이를 ‘디컴프레션(decompression)’이라고 했다. “일상에서의 분주함과 긴장을 건물 밖에 남겨두고, 천천히 숨을 고른 후 공연의 세계로 들어오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설명이다. 일종의 ‘슬립 노모어’ 세계로의 ‘동기화’인 것이다. 이는 막대한 자본이 설계한 환상에 쉽게 투항하는 전략적 장치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Macbeth)를 히치콕 스타일의 ‘누아르 서스펜스’로 재구성한 ‘슬립 노모어’ [미쓰 잭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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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연극에 환멸”…‘맥베스’와 만난 히치콕, 어떻게 태어났나?
‘슬립 노모어’는 멍하니 앉아서 관람하는 공연이 아니다. 프로시니엄(Proscenium) 공연장처럼 가만히 앉아 공연을 관람하지 않는다. 새하얀 가면을 쓰고 ‘익명의 유령’ 관찰자가 돼 호텔 구석구석을 탐험한다.
그러니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필수’는 아니나, ‘발 건강’이 염려된다면 가급적 ‘편한 신발’을 착용할 것. ‘유산소 운동’ 못잖은 ‘슬로우 조깅’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지켜야 할 규칙도 존재한다. ‘절대적 침묵’이다. 마스크로는 얼굴을 가려야 하며,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방해해선 안되고, 말을 걸어서도 안 된다.
‘침묵의 미궁’ 안에선 누구라도 들끓는 욕망의 도파민에 정복당한다. 마스크는 관객을 익명화해 관음증적 시선을 정당화하고, 극에 온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심리적 방어 기제 역할을 한다. 배우와 함께 걷고 뛰다 보면 관객들은 자신만의 동선과 시점에 따라 파편화된 서사를 재구성하며 영화 같은 세계관을 직조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Macbeth)를 히치콕 스타일의 ‘누아르 서스펜스’로 재구성한 ‘슬립 노모어’ [미쓰 잭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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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렛 연출가는 이머시브 공연의 미학을 재창조하고 완성한 선구자다. 그가 이머시브 공연을 구상한 것은 “전통적인 연극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바렛 연출가는 “(사실) 엘리자베스 시대의 런던에서 셰익스피어 공연을 보러 갔을 때는, 관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양배추를 던지거나 야유를 보낼 수도 있었다. 돈을 낸 관객이라면 그만큼의 주도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조금 더 ‘위험’하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연극을 창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관객을 ‘통제 밖의 상황’에 두고,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하는 공연을 구상한 계기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뇌의 활동 중 약 10% 정도만 쓰지만, 일어나서 스스로 선택하고 움직이게 되면 몸이 자극받고, 결정을 내려야 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며 “그러면 평소에 활성화되지 않던 뇌의 여러 영역이 자극받게 되고, 여기에 어둠과 위험, 긴장이 더해지면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분비된다. 그러면 ‘투쟁-도피 반응(fight or flight)’이 작동하고 모든 감각이 깨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긴장 상태의 관객이 극 중 세계를 더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받아들이는 촉매제로서 이머시브 공연이 안성맞춤이라고 본 것이다.
뇌를 찌르는 광란의 테크노…반라의 춤, 피 칠갑 맥베스가 눈앞에
강렬한 전자음악이 뇌를 찌르는 스트로브 조명 아래, 반라의 마녀들이 사지를 뒤튼다. 춤 같기도 의식 같기도 한 광란의 테크노 파티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레이저 조명과 프레임 단위로 쪼개지는 배우들의 현대무용이 이어지는 레이브 장면.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취기가 오르고, 환각 파티에 온 듯한 초자연적 경험이 찾아온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Macbeth)를 히치콕 스타일의 ‘누아르 서스펜스’로 재구성한 논버벌 퍼포먼스 ‘슬립 노모어’ [미쓰잭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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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립 노모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중심으로 3대 서사축이 공연을 지탱한다. 권력을 향한 야망, 왕의 시해, 죄책감으로 인한 파멸이라는 비극적 뼈대를 세우는 ‘맥베스’와 히치콕 감독의 누아르 영화 ‘레베카’, ‘현기증’이 시각적 미학으로 작품을 감싼다. 여기에 1697년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의 역사가 ‘가로 그린’ 거리와 마녀들의 예언 장면에 녹아들었다.
바렛 연출가는 “‘맥베스’의 이야기 구조를 해체해 연극 무대에서 상대적으로 출연 분량이 적은 맥더프 부인이나 포터 같은 인물들의 서사를 깊이 파고들어 그들의 성격과 내면을 더 들여다볼 수 있게 구성했다”고 말했다.
또 공포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로즈메리의 아기’에도 영향을 받았다. 바렛 연출가와 도일 안무가는 “건물 내부의 긴 복도는 스탠리 뷰크릭의 ‘샤이닝’ 오마주를 자연스럽게 녹였고, 스타일과 인물에 대한 감각, 정서적 측면은 데이비드 린치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린치는 2002년 초연 때부터 중요한 레퍼런스였다고 한다.
3대 축을 바탕으로 각각의 공간에서 총 18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의 주요 장면을 중심으로 삼아 서사가 구성됐고, 이야기의 흐름별로 장면을 구성했다. 도일 안무가는 “인물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드라마틱한 기승전결보다 공간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집중하는 역할을 한다”며 “관객에게 이 세계가 실제로 살아 숨 쉬는 공간처럼 느껴지려면, 이 캐릭터들이 진짜 존재하는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길고 방대한 스토리는 3시간 동안 세 번 반복된다. ‘슬립 노모어’의 핵심 구조다.
바렛 연출가는 “단선적인 이야기나 특정 인물의 서사만을 전달하는 대신, 원작 텍스트를 해체해 모든 등장인물이 항상 공연 공간 안에 존재하도록 구성했다”며 “이 구성을 통해 관객이 누구든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다만 동시에 여러 인물을 따라갈 수는 없기에 ‘루프’ 구조를 통해 같은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다시 볼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시간에 맥베스를 따라갔다면, 두 번째엔 맥더프 부인을 따라가며 자신의 관람 경험을 “스스로 통제하고, 주도권을 갖는 방식”이라고 그는 귀띔했다.
이머시브 공연 ‘슬립 노모어’ [미쓰 잭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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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설계된 놀이터에서 만나는 정당한 ‘관음증’과 도파민
‘슬립 노모어’는 공간이 곧 서사가 되고, 관객이 곧 창작자가 되는 ‘이머시브 시어터’의 정수에 가깝다. 관객 역시 ‘주도적’이라고 믿을 만하나, 사실 ‘슬립 노모어’는 창작진의 머릿속에서 설계된 ‘거대한 놀이터’다. 관객은 창작진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따라, 그들이 흩뿌린 서사의 조각을 찾아 나간다.
매키탄 호텔의 7개 층은 셰익스피어의 고전과 히치콕의 미학, 스코틀랜드의 역사가 만나 빚어낸 지적·감각적 미로로 얽혀있다. 이 공간은 관객들의 편도체를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도파민을 촉진하는 자극적인 장면이 난무하고, 낯선 공간을 걷고 뛰면서 관객들은 ‘의미’를 생각하기 이전에 ‘신체적 긴장감’을 먼저 느낀다. 전통적 연극이 관객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과 달리, ‘슬립 노모어’는 머리가 아닌 몸으로 공연을 ‘체험’하도록 설계된 장치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마스크의 역할’이다. 마스크는 나를 숨기는 동시에 관객을 ‘익명화된 유령’으로 만든다.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행동도 마스크 뒤에 숨어 과감하게 행동한다.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는데 코앞까지 다가서서 얼굴을 들이밀거나, 서랍을 뒤지는 것도 일종의 금기를 깨는 행동이다. 게다가 마스크 뒤에 숨어 윤리적 자각 없이 관음증을 정당화한다. 맥베스 부인의 전라 목욕 장면, 반라의 테크노 파티를 봐야하는 것은 공격적 관음증이 절정에 달해 뒷맛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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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립 노모어’는 정해진 동선이 없다. 관객은 특정 장면을 선택해서 보거나 보지 않을 수 있다. 창작진이 이야기하는 ‘주도권’은 여기에서 주어진다. 하지만 ‘선택적 회피’는 관객에게 양가 감정을 안긴다. 24만 원~70만 원에 달하는 이상의 ‘패스트 트랙’을 포함한 스페셜 티켓을 제외하고도 20만원~16만원(입장시간에 따라)에 달하는 고가의 티켓가로 인해 관객은 이미 회자된 ‘명장면’을 하이에나처럼 쫓는다. 이러한 이유로 관객 사이에선 “스포일러를 알고 가는 것이 공연을 잘 즐기는 방법”이라는 반응이 많다. 물론 제작진의 생각은 다르다. 바렛 연출가는 “용감한 자에게 행운이 따른다”며 “덜 붐비는 곳으로 가라, 거기에 당신의 보물이 있다”고 말한다.
어찌됐건 ‘매키탄 호텔’엔 안전하게 설계된 공포와 위기, 자극이 넘쳐난다. ‘침묵’과 ‘도둑질 금지’, ‘마스크 착용’의 규칙만 지킨다면, 이곳은 자본이 용인한 거대한 도파민 충전소와 같다. 그러니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낯섦의 미학’과 ‘미지의 공포’를 충분히 즐기는 것도 좋다.
바렛 연출가는 “이곳엔 정답도 오답도 없다”며 “통제를 내려놓고, ‘모름’에서 오는 긴장과 순간적 발견을 즐겨보라. 가장 중요한 건,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을 붙잡고 누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매키탄 호텔의 문을 다시 열고 나올 땐, 더 많은 도파민을 갈망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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