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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0 (금)

    [헤럴드광장] 꼬리 위험에 기초한 연금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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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럴드경제


    사람들은 강을 건널 때 평균 수심을 묻는다. 대체로 “허리 정도”라는 대답을 들으면 안심하고 발을 디딘다. 하지만 강에는 늘 깊은 웅덩이가 있다. 몇 걸음만 옮기면 갑자기 발이 닿지 않는 구간이 나타난다.

    평균 수심은 낮아도, 사람은 익사할 수 있다. 노후 소득도 비슷하다. 평균적인 삶의 길이를 기준으로 설계하면 대다수 사람에게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평균이 아니라, 삶의 끝자락에 숨어 있는 깊은 웅덩이, 즉 꼬리 위험이다.

    연금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대다수 사람은 그 정도까지 오래 살지 않아”라는 주장을 종종 듣게 된다. 그리곤 오래 사는 걸 가정한 종신연금은 비싸고, 10년이나 20년의 확정 기간 연금 수령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사실 은퇴 직후의 소득 공백은 현실적이고 고통스럽다. 정년퇴직 후 국민연금을 받기 전 몇 년의 기간, 의료비와 주거비 부담에 사람들은 현금흐름에 목말라한다. 그러니 초기에 연금을 더 받고, 이후에는 연금을 조정하는 설계가 유효할 수 있다. 노후 정책이 ‘종신’이라는 한 단어로 모든 문제를 덮을 수 없다는 점도 맞다.

    그렇다면 정책이 해결해야 할 위험은 대다수 사람이 겪는 평균적인 불편인가, 아니면 소수의 사람에게만 발생하지만 한 번 터지면 삶을 무너뜨리는 파국인가. 장수는 축복이지만, 자산이 바닥난 장수는 곧바로 빈곤과 돌봄 공백이 된다. 이때의 손실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삶의 질 전체를 무너뜨리는 비대칭적 손실이다. 그래서 장수위험은 개인이 혼자 떠안기 어려운 위험이다. 꼬리 구간에서는 개인이 생존 기간을 가늠하기 어렵고, 의료와 돌봄의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런 위험은 공동체를 구성해 공유할 때 비로소 관리될 수 있다.

    같은 이유로 연금 정책을 ‘원금을 불리는 자산운용’으로만 환원하는 접근도 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수익률을 높이면 평균적으로 연금액이 늘어나는 듯 보이지만, 그 평균은 시장이 좋았던 기억에 기대기 쉽고, 평균 수익률이 같아도 손익의 순서에 따라 인출 가능액이 달라지는 순서위험에 노출되기도 쉽다.

    무엇보다 자산운용은 원금을 키우는 기술일 뿐, 오래 살 위험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해법은 수익률이 아니라, 초고령 구간의 자산 고갈을 막는 위험공유와 보험 설계로 다뤄야 한다.

    현실적인 해법은 강의 웅덩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은퇴 초반에는 생활을 설계할 자유를 주되, 초고령 구간에는 최소한의 안정적인 현금흐름이 제공되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60세부터 84세까지는 계획형 인출과 기간 확정형을 조합하고, 85세 이후에는 거치형 종신연금 같은 지연개시 종신 급부로 ‘고갈 이후의 추락’을 막는 구조다.

    이렇게 하면 종신연금 수령에 따르는 비용을 정년퇴직 후 전체 생존 기간이 아니라, 위험이 집중되는 꼬리 구간에서만 부담할 수 있다.

    정책은 평균을 존중하되 꼬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평균은 삶의 경향을 말해주지만, 꼬리는 삶의 경계선을 결정한다. 연금 정책의 품질은 그 경계선에서 드러난다. 강의 평균 수심을 알려주는 정책이 아니라, 가장 깊은 웅덩이를 표시하고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정책, 그것이 꼬리 위험에 기초한 연금 정책이다.

    김해식 보험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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