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종묘와 사직
선대왕 위패 모신 종묘
신·왕·세자 동행 ‘삼도’ 지나
광활한 월대 위 정전 조우
생사경계 이어… 위용 압권
‘국가제례 공간’ 사직단
일제, 건물 허물고 공원화
정사각형 사단·직단 남아
‘천원지방’의 우주관 구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외척간신들에게 휘둘리고 비선실세에게 놀아나는 왕에게 신하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종묘는 선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고 사직은 나라를 지켜주는 토지의 신(국사·國社)과 곡식의 신(국직·國稷)에게 제례를 올리는 제단이다. 그래서 종묘와 사직은 조선을 지탱하는 정신적 근간이자, 왕조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성역이었다.
종묘(위 사진)와 사직단은 수직으로 솟은 건축물로 채워진 서울에서 수평의 엄숙함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수평으로 긴 정전과 월대, 그리고 두 제단을 통해 우리는 올곧이 내면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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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와 사직단은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동쪽)과 우측(서쪽)에 자리한다. 이는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 기록된 왕도의 조성 원칙인 ‘좌조우사, 면조후시(左祖右社, 面朝後市)’ 중 종묘는 좌측, 사직은 우측에 둔다는 내용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종 이후 왕들은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 머물렀다. 그래서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루는 동궐(東闕) 영역에 속하는 종묘는 왕에게 단순한 제례 공간을 넘어 심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안식처였을 것이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단이 필요할 때, 또는 번잡한 정무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왕이 종묘의 숲을 찾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 조상의 숲에서 왕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질문들을 던졌을 것이고, 선대 왕들은 깊은 침묵으로 그 질문에 답했을 것이다.
종묘와 사직이 지닌 상징적 무게를 잘 알고 있었던 일제는 두 공간을 체계적으로 훼손했다. 그런데 그 방식은 교묘하게 달랐다. 종묘에서는 도로(율곡로)를 개통해 지맥을 끊고 종묘 제례를 왕가의 제사로 격하시켰다. 사직단에서는 제사를 완전히 폐지하고 부속 건물을 서서히 철거하다 아예 공원으로 만들었다.
사직공원의 어수선한 풍경 속에 남은 사직단의 흔적은 토지신을 모시는 사단(동단)과 곡식신을 모시는 직단(서단)뿐이었다. 두 제단은 한 변의 길이가 7.65m인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1m이다. 사실, 정사각형은 자연 상태의 지형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관념적인 도형이다. 더군다나 옛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天圓地方)고 믿었다. 이 우주관에 비추어보면, 정사각형의 두 제단은 조선이 기반으로 삼았던 땅의 이상적인 형태다.
두 제단을 둘러싸고 정사각형의 돌담이 있고 다시 그 바깥에 직사각형의 돌담이 쳐져 있다. 바깥담의 각 변에는 신이 드나드는 문(神門)이 있고 돌길이 신문을 연결한다. 돌길은 직각으로 꺾여 있는데, 인간의 보행에 있어 직각으로 꺾인 길은 뭔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하지만 이 길은 인간의 길이 아닌 신의 길이다. 그중 북신문에서 직각으로 세 번 꺾여 서신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향축로(香祝路)’라 부른다. 제례에 쓰이는 향과 축문이 이동하는 이 길의 단호한 직각은, 제례 공간이 지녀야 하는 절제된 위엄을 보여준다.
사직단에서 나란히 배치된 두 제단을 보려면 북신문이나 남신문에서 바라봐야 하고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모습을 보려면 동신문에서 바라봐야 한다. 어디서 보든 사직단의 본질은 ‘수평의 아름다움’에 있다. 수직이 위로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을 대변한다면, 수평은 모든 것이 시작되고 되돌아가는 자연의 섭리를 닮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직단을 에워싼 고층 건물들의 어수선한 수직성은 국가 제례 공간으로서의 장엄함이나 신성함을 느끼기 힘들게 한다.
사직단과 마찬가지로 종묘에도 신의 영역으로 이르는 돌길이 깔려 있다. 그런데 종묘의 돌길은 신(神), 왕(王), 세자(世子)가 함께하는 ‘삼도(三道)’다. 삼도에서 가운데 살짝 올라와 있는 부분이 신의 길이고, 동측이 왕의 길, 서측이 세자의 길이다. 종묘에서 삼도는 과거(조상)와 현재(왕) 그리고 미래의 권력(세자)이 한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길이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에서 출발한 삼도의 목적지는 정전(正殿)의 정문인 남신문이다. 정전의 경역으로 들어서면 방문객은 좌우로 펼쳐진 거대한 목조 건축물과 그 앞에 텅 빈 월대(月臺)를 마주하게 된다. 압도적인 수평성 앞에서 짧은 탄식과 함께 침묵이 따라온다. 정전은 조선이 건국되고 3년이 지난 1395년에 7칸으로 처음 지어졌다. 이후, 4칸씩 총 세 번에 걸쳐 증축돼 최종적으로 19칸이 되었다. 정전은 선대 왕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자 국가의 정신과도 같은 곳이기에 증축될 때마다 그 자체로 ‘완성된 건물’이어야 했다. 동시에 후대 왕들의 신위를 더 이상 모실 곳이 없게 되면 왕조의 끝을 암시하기에 다음 증축을 생각해야 하는 ‘열린 건물’이기도 하다. 즉, 종묘는 조선과 함께 성장하면서 매 순간 조선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증축의 기준은 서쪽이었다. 서쪽은 해가 지는 자리로 죽음과 소멸을 상징한다. 종묘는 죽은 왕들의 공간이니 서쪽이 상석이다. 그래서 선대 왕의 신위가 서쪽 맨 끝에 자리를 잡고, 그다음 왕들의 신위가 동쪽으로 차례차례 안치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까지 추존 4대의 신주가 봉안된 영녕전(永寧殿)이 정전 서쪽에 배치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정전의 압도적인 위엄은 그 앞의 광활한 월대로 인해 증폭된다. 제례 의식이 열리는 이 무대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빈 상태로 남겨져 있다. 불규칙한 박석으로 채워진 월대는 지면보다 1m 정도 올라가 있지만, 신위가 모셔져 있는 곳보다는 1.5m 정도 내려가 있다. 땅이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이고 정전 내부가 죽은 자들의 안식처라면, 월대는 그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영역’이다. 산 자의 공간도 그렇다고 죽은 자의 공간도 아닌 월대에서 내게 가장 편한 자리는 모서리다. 모서리 끝에 서서 월대와 정전을 바라보면 마치 하나의 세계에서 살짝 벗어난 제삼자의 입장이 된 듯하다. 그 낯선 시선 속에서 종묘의 수평선은 단순한 건축적인 형태를 넘어, 시간을 견뎌낸 존재들이 내뿜는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지난해 10월 말, 서울시는 세운재정비 촉진지구 정비사업을 추진하며 세운4구역의 높이 제한을 종로변 98.7m, 청계천변 141.9m까지 허용하는 계획안을 고시했다. 녹지축 확보를 전제로 한 높이 완화는 잠잠했던 종묘 경관 논란에 다시 불을 지폈다. 이후 도시, 건축, 개발사업, 문화재 전문가들이 연일 각자의 의견을 개진했고 언론이 이를 실어날랐다. 논점은 명확했다. 세운상가 주변의 고밀 개발과 종묘에서 바라보는 역사적 경관의 보존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는 단순히 높이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관의 싸움이었다.
흔히 서울의 매력과 정체성을 여러 시대의 층위가 한 장소에 중첩된 ‘다양성의 공존’으로 꼽는다. 그리고 이런 시각이 이번 종묘 경관 논란에도 적용됐다. 사직단을 비롯해 4대 궁궐 안에서 그 주변을 바라보면 역사적 건축물과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함께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의 전제는 동의하면서도 결론에는 반대한다. 서울의 매력이 ‘다양성의 공존’에 있다면 사직단이나 4대 궁궐과 달리 수평의 건축과 무한한 하늘만을 올곧이 마주할 수 있는 공간도 한 곳쯤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금 종묘가 지닌 대체 불가능한 유일함이다. 그리고 이 유일함이 유지돼야 서울이 지닌 다양성의 스펙트럼이 완성될 수 있다. 서울의 진짜 매력은 ‘다양성의 공존’을 모든 곳에서 마주하는 균일함이 아니라, 수직의 빌딩 숲 한가운데에서 오직 하늘과 나만이 침묵 속에 대면할 수 있는 ‘수평의 존엄’도 있다는 데 있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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