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위고의 문장에서 발아한 신작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3전4기 결실
“글 한 줄에도 책임이 따르는 시대”
일상이 곧 예술 “모든 걸 쏟아부었다”
뮤지컬 ‘조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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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눈물로 지어진 것이다.”
한 줄의 문장은 ‘창작의 씨앗’이 됐다. 1869년, ‘레 미제라블’의 성공 이후 유럽의 거인으로 추앙받은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였다. 시대의 모순을 고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작가이자 사회 운동가였던 위고가 망명 시기에 내놓은 소설이다.
“도산 안창호 관련 프로젝트를 하면서 LA 한인타운에 머물고 있을 때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 속 이 문장을 다시 만났어요.”
차가 없으면 이동조차 어려운 ‘고립된 시간’ 속에서 그는 석 달간 신작 뮤지컬의 초고를 완성했다. 한국 창작 뮤지컬의 ‘성공 신화’를 쓴 추정화 연출가다.
19세기를 건너 ‘오늘의 무대’에 도착한 위고의 이야기는 지극히 ‘현대적’인 제목을 입었다. 할리우드 영화로 더 익숙한 ‘조커‘. 이 캐릭터의 기원 자체가 위고의 ‘웃는 남자’다. 추정화 연출가는 제작자인 엄홍현 EMK뮤지컬컴퍼니 대표에게 사전에 양해를 구했다. 엄 대표는 “제발 만들어달라”고 흔쾌히 승낙하며, “제목을 ‘조커’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초 ‘웃는 남자’를 제목으로 붙이고 싶었으나 내부 반대에 부딪혀 무산,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았다.
집필이 시작되자, 위고의 19세기는 시간을 건너와 ‘오늘의 무대’에서 발아됐다.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뮤지컬 ‘조커(JOKER)’. 2013년 ‘달을 품은 슈퍼맨’을 통해 창작자로 첫발을 디딘 추정화 연출이 숱한 히트작을 낸 뒤 3전 4기 끝에 ‘창작산실’에 선정된 첫 작품이다.
80석 소극장으로 들어온 오트빌 하우스
1860년대 후반, 건지섬의 ‘오트빌 하우스’(Hauteville House) 1층. “홈랜드(homeland, 조국)는 없어도 홈(home)은 갖고 싶다”는 위고가 망명 생활을 위해 직접 설계한 곳이다. 커다란 통창에서 바다 건너 프랑스를 바라보며 글을 쓰던 4층짜리 집이 고작 110석의 소극장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1층 구조와 모래시계형 계단으로 좌우 균형을 맞춘 무대는 위고의 피난처이자 권력에 저항하는 ‘펜의 요새’다.
제작진은 이 무대를 꾸미기 위해 대학로 ‘극장 온’의 앞줄 두 열을 과감히 들어냈다. 무려 34석이 날아간 극장은 객석보다 무대가 더 크다. “80석만 차면 만석”이라며 추 연출가는 웃었지만, 수익보다 완성도가 중요했던 창작자의 결단이다. 본래 “중대극장을 염두하고 쓴 뮤지컬”이었지만, 대학로의 ‘대관 전쟁’으로 소극장을 선택했다. 추 연출가는 “그럼에도 우리가 구현하고자 했던 것을 어느 정도의 선에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뮤지컬 ‘조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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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웃는 남자’를 쓰던 때의 위고로 향한다. ‘레 미제라블’의 성공 이후 위고의 날들은 창작의 고통과 정치적 신념 사이에서 치열하게 충돌한다. 이때 그를 찾아온 네 명의 연극쟁이들, 즉 극단을 이끄는 우르수스, 그의 양아들 조나스, 귀족 출신 배우 줄리앙, 소수자 가브리엘 등이 노래한다.
“거인과 시인, 정의와 불의, 충돌과 변화, 구걸하고 훔쳐서라도 쟁취해야 할 자유와 사랑, 무력한 세상 무력을 써라, 비틀고 뭉개 쓰러지고 힘들더라도, 앞으로 닥칠 미래를 위해, 부끄럽지 않을 역사를 위해” (‘조커’ 첫 넘버 ‘위고’ 중)
19세기 대문호의 이야기는 2026년의 우리와 연결돼 ‘동시대의 목소리’를 입었다. 추 연출가는 “당대 베스트셀러를 쓴 위대한 작가이기에 사회적 책임과 명성이 그를 짓눌러 뭔가를 선택하는 것에 있어 두려움과 고민이 깊었을 것 같다”며 “거기서부터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귀띔했다.
바야흐로 모두가 창작자인 시대. 추 연출가는 “모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글을 쓰고 댓글을 다는 시대”라며 “익명 뒤에 숨어 휘갈겨 쓰는 글 한 줄에도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위대한 비평가가 위대한 작가를 만든다”는 추 연출가의 지론은 극장을 찾는 관객에게도 향한다.
위고의 고민이 작품을 지탱하는 뼈대라면, 5명의 조력자는 위고가 꿈꾸던 세상의 조각들이다. 위고의 정신적 지주인 줄리엣, 연극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우르수스, 마술사이자 젊은 세대의 분노를 상징하는 조나스 등은 고전의 서사에 현대적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특히 ‘조커’ 카드가 유럽으로 유입되던 역사적 고증을 바탕으로 설정된 조나스는 제목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핵심 장치다.
“세상에서 저마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고집스럽게 밑바닥으로 내려와서 살고 있는 각양각색의 존재들이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속할 수 있는 세상에서 저마다의 꿈과 사랑을 이뤄가는 미래, 그것에 빅토르 위고가 꿈꾸는 세상이었을 거예요.”
뮤지컬 ‘조커’의 극작과 연출을 맡은 추정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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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의 예술’ 빚는 25년차 ‘황금 부부’
이 치열한 서사에 숨을 불어넣은 것은 허수현 음악감독이다. 두 사람은 2001년 뮤지컬 ‘베르테르’에서 배우와 편곡자로 처음 만났다. 서울예대 연극과 95학번인 추정화는 “무대에서 죽을 것”이라던 천생 배우였다. 유해진이 그의 동기다. 대학로에서도 연기 잘하는 배우로 유명했지만, 농담처럼 허 감독은 “나중에 불러주는 데가 없으면 어떻게 할 거냐”며 창작을 권했다. 배우 추정화 안에서 반짝이던 또 다른 재능을 이미 알아본 것이다. 글을 쓰던 추 연출가에게 “다른 사람은 당신 글을 이해하지 못하니 직접 연출을 하라”고 권한 것도 허 감독이다.
두 사람은 2013년 ‘달을 품은 슈퍼맨’을 시작으로 ‘인터뷰’, ‘스모크’,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 ‘프리다’ 등 대학로에서 시작해 대극장과 해외 시장까지 점령한 ‘황금 부부’다.
부부의 작업 방식은 ‘치열한 합의’의 연속이다. 추 연출이 던지는 언어와 구조를 허 감독은 선율로 번역한다.
대본을 손에 쥐면 허 감독의 고민이 시작된다. 그는 “추 감독의 대본은 쉽지 않다. 챕터마다 변화가 많고, 대사마다 마디를 바꿔야 해 한 번에 감을 잡을 수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기존 뮤지컬 어법과는 다른 문학적인 가사, 밀도 높은 대본을 극대화하기 위해 허 감독은 ‘변화 값이 큰 넘버’를 창조했다.
“추 연출님의 머릿속에 작품의 음악적인 그림의 구도가 정해져 있어요. 본인은 작곡만 못 할 뿐이지 생각하는 것이 있어 그걸 저를 통해 꺼내는 거죠. 곡이 나올 때까지 훈육하면서 끌어가죠. (웃음)”
허수현 음악감독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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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이 나오기까지 허 감독은 창작의 미로를 헤매지만, 일단 ‘첫 곡’이 나오면 그때부턴 일사천리다. 허 감독은 “첫 번째 곡이 풀리면 다 풀린다”며 “이상을 소재로 한 ‘스모크’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조커’의 음악은 특정한 형식에 갇히지 않는다. 대사처럼 흘러가다, 어느 순간 선율로 확장되며, 다시 리프라이즈를 통해 의미를 축적한다. 음악이 독립적인 ‘번호’로 존재하기보다, 드라마의 호흡 자체가 되는 과정이다.
게다가 음악은 단순히 감정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밀한 심리 변화를 따라가기 위해 대사 한마디에 맞춰 리듬과 조성이 수시로 바뀐다. 뮤지컬의 첫 곡인 ‘위고’는 위대함 뒤에 숨겨진 인간적 나약함과 그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을 웅장하고도 처절한 선율로 담아낸다. 특히 소극장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라이브 연주를 적극 활용, 대극장 스케일의 음악을 현미경처럼 정밀하게 전달하는 독특한 사운드 텍스처를 구축했다.
극중극 장면에서 ‘서커스’로 무대를 전환할 때, 허 감독은 ‘공간적 배경’을 음악적으로 구현하는 데에 중점을 뒀다. 그는 “소극장 작품이지만 중대극장의 스케일을 고려했다”며, 5인조 라이브 세션에 현악기와 팝적인 요소를 가미했다고 귀띔했다. 낯설지 않지만, 쉽게 소비되지도 않는 질감의 음악은 ‘고급스러운 대중성’을 완성한다.
추 연출가는 허 감독을 향해 “나라는 큰 벽을 넘어야 하는 사람”이라며 농담 섞인 신뢰를 보내며 “밥을 먹다가도 ‘이 부분은 음정을 낮추는 게 어떠냐’며 작품을 할 때는 그 작품 이야기밖에 안 한다. 그게 우리 삶과 창작의 동력”이라고 했다.
뮤지컬 ‘조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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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는 역풍에 맞설 때만 돌아간다”
두 사람의 예술 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람개비’다. 추 연출은 “바람개비는 바람에 맞서지 않으면 돌지 않는다”며 “순풍에 돛 단 듯 사는 인생보다, 역풍을 맞으며 필사적으로 뛰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간다”고 했다.
가난과 비난 속에 살았던 이상(‘스모크’), 실명과 청력 상실의 고통을 딛고 선 베토벤(‘루드윅 더 베토벤’), 평생 사고와 장애를 안고 살았던 프리다 칼로(‘프리다’)처럼 고통 속에서 예술을 꽃피우는 인물들에게 천착하는 이유다.
물론 두 사람이 예술가를 다룬 작품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한창 공연 중인 ‘은밀하게 위대하게’는 10주년을 맞은 성공작이다. 초연 당시 8명의 배우와 200석 소극장에서 시작해 현재 17명의 배우가 422석의 뮤지컬에 서고 있다. ‘계단식 성장’의 정석이자 대학로 뮤지컬의 성공 신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흔히 뮤지컬계에선 소극장과 대극장 뮤지컬은 문법이 달라 극장 사이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하지만, 추 연출가의 작품은 매번 소극장에서 출발해 규모를 키웠다. 그는 “작품의 규모는 커지나 기본 뼈대는 바꾼 적이 없다”라며 “시간의 흐름으로 낡은 느낌의 음악을 세련되게 수정한 정도의 변화만 줬다”고 했다. 이미 초연을 올릴 때부터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완성도를 높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학로의 터줏대감이자 소극장과 대극장을 오가는 추 연출가는 뮤지컬 산업의 변화를 누구보다 체감한다. 그는 “‘뮤지컬 메카는 웨스트엔드, 브로드웨이 다음이 대학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성장했고, 다양한 작품이 나오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대학로 뮤지컬에 대해서도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크다.
뮤지컬 ‘조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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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배우에게 치우치거나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관객의 사랑만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있어요. 관객들이 선호하는 성향의 작품만 올라올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작품이 오르는 공간이자 꿈꾸는 모든 사람의 시발점이 대학로가 되면 좋겠어요.”
현실은 더 잔혹해졌다. 요즘 대학로는 소위 ‘대학로 아이돌’로 불리는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으로 돌아간다. 소극장 공연은 오디션도 사라져 신예들이 나오기 어려운 곳이 됐다. 추 연출가는 “잘나가는 배우들로 구성하기도 힘든데 오디션까지 열 여력이 안 되는 것“이라며 “그럼에도 신인 배우들이 기회를 얻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토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추 연출가는 이런 이유로 일부 배역은 신인이나 지역에서 활동하는 배우들을 발탁해 무대에 올렸다.
배우 출신이었던 만큼 연습 과정은 지독하다. 식사 시간을 줄여가며 연기를 지도한다. 그의 대본은 특히나 ‘일상의 언어’가 아니기에 발음이 쉽지 않다. 그러니 발성, 발음은 기본, 1.5배속에서 2배속까지 조절하는 ‘말의 템포’를 집요하게 가르친다. “불편해도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연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일상 연기가 ‘대세’로 떠올라 무대 위 연기마저 ‘딕션’이 무너져버렸지만, 그는 무대의 기본은 ‘딕션’이라고 강조한다.
“배우들이 편안한 연기를 추구한다고 하면, 전 ‘왕과 사는 남자’의 유해진 배우가 연기한 엄홍도를 보라고 이야기해요. 저기 어디에 편안함이 있냐고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한다고 요즘엔 입도 크게 안 벌리려 하는데, 그게 보편적인 절댓값은 아닌 거죠.”
부부이자 창작 파트너로 보낸 10여 년. 두 사람은 함께 성장하며 꿈을 키워왔다. 내년에는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신작 ‘몽중인’을 통해 또 다른 실험에 나선다.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추 연출의 다짐은 여전히 뜨겁다.
“제작비가 부족하면 우리 부부가 덜 가져가면 돼요. 그렇게 해서라도 관객에게 부끄럽지 않은 무대를 보여주고 싶어요. 이번에도 다 털어 넣었거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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