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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3.29 (일)

    사고 나면 정부 탓?...규제 악순환 부르는 '정부책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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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K인사이트 보고서

    한국은 '수영 금지' 미국은 '본인 책임'

    사고 공포에 사전 규제만 늘어…사후 책임 체계 미비

    행정부 기득권 걸림돌…"국무조정실 간부, 개방직 뽑아야"

    [세종=이데일리 하상렬 기자] 미국 해변에 “수영은 본인 책임(Swim at your own risk)”이라는 팻말이 붙을 때 한국 해변에는 “수영 금지” 팻말이 붙는다. 사고가 나면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니 개인에게 자유를 주기보다 정부가 미리 허락한 것만 하라는 ‘사전 허가(포지티브)’ 방식의 규제가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규제개혁이 10년 넘게 제자리걸음인 결정적 이유다.

    이데일리

    사진=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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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공개한 ‘K인사이트’ 보고서에 따르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평가한 규제 경쟁력(정부효율성 부문 기업 여건 항목)에서 우리나라는 최근 10년 동안 세계 50위권에 머물렀다. 같은 기간 국가 종합 순위는 20위권인데 규제 분야만 ‘낙제점’을 받은 것이다. 보고서를 집필한 박진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그 원인으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정부책임주의’를 지목했다.

    정부책임주의는 모든 사고의 화살을 정부로 돌리는 인식을 말한다. 과거 대학생 엠티(MT) 중 발생한 실족 사고에 교육부가 직접 대책을 내놓은 것이 대표적이다. 개인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영역까지 정부가 ‘보호자’로 개입하는 문화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규제를 풀어줬다가 사고가 터져 독박을 쓰느니 촘촘한 규제를 쌓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 된다. ‘사고 나면 끝’이라는 공포가 공무원을 면피 행정에 매몰시키고, 새로운 규제를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원인이 된 셈이다.

    규제 혁신의 핵심은 ‘허락’을 ‘책임’으로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 사업 전 정부의 서류 심사를 받는 대신(사전 허가) 일단 자유롭게 사업을 하되, 문제가 생기면 법원이 엄중한 벌을 내리는 ‘사후 책임’ 방식(네거티브 규제)으로 전환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 책임을 물어야 할 사법 시스템이 사실상 마비 상태다. 민사 1심 합의부 사건 처리 기간은 2019년 298일에서 지난해 437일로 5년 새 47%나 급증했다. 재판 한 번에 1년이 넘게 걸리고 피해 보상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국민들은 ‘나중에 법으로 해결하자’는 말을 믿지 못하고 ‘처음부터 정부가 막으라’고 요구한다. 규범 위반에 ‘서민 주머니 털기’라며 비판하는 온정적 태도와 집단주의 문화까지 더해져 엄정한 사후 처벌을 가로막고 있다.

    권력을 내놓기 싫은 관료 조직의 기득권도 걸림돌이다. 규제를 사후 책임 방식으로 바꾸면 사전 허가권을 쥔 행정부 권한이 처벌권을 가진 사법부로 넘어간다. 부처들이 입으로는 규제개혁을 외치면서도 정작 알맹이인 ‘허가권’에는 손을 대지 않는 배경이다.

    박 교수는 파격적인 인적 쇄신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규제 컨트롤타워인 국무조정실 등 핵심 부처의 간부직을 민간 전문가로 대거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료 특유의 사전 규제 사고방식을 도려내지 않는 한 규제개혁은 시늉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그는 “규제개혁에 성공하려면 일선 판사 증원과 민사 배상 강화, 그리고 정부책임주의 탈피가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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