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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7 (수)

이슈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월간중앙] 소수정당 몰락 부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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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특집 - 정치초점

“민주당 ‘미끼상품’에 정의당 속았다”

다당제 지향하려던 선거법 개정, 위성정당 출현으로 양당제 강화 도구로 변질

총선 직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무용론 대두… 대통령제와 안 맞는다는 지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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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정의당 상임선대위원장은 4월 16일 선대위 해단식에서 ’더 많이 당선 못 시켜 미안하다“며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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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1번과 2번 정당이 없어요?”

2020년 4월 15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투표장에서 작은 소동이 일었다. 한 유권자가 “정당 투표용지에 자기가 찍고 싶은 정당이 보이지 않는다”고 항의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있어야 할 첫 번째와 두 번째 칸에 민생당과 미래한국당이라는 당명이 찍혀 있어서 혼란을 일으킨 것이다. 실제 민생당은 기호 3번이지만, 정당투표 용지에는 맨 위 칸을 차지했다. 민생당은 내심 착각을 일으킨 민주당 지지자들의 표를 기대했다. 그러나 민생당의 득표율은 2.7%에 그쳤다. 3%에 미달해 단 1석의 비례대표 의원도 배출하지 못했다.

희극적 비극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21대 총선의 정당 투표용지 길이는 48.1㎝였다. 3번부터 37번까지, 총 35개 정당 이름이 기재됐다. 자동 개표기가 처리할 수 있는 길이는 34.9㎝다. 용지가 너무 길어서 손(手) 개표를 해야 했다. 16일 오전이 지나서야 비례대표 의석수 배분이 확정됐다. 결과는 미래한국당 19석, 더불어시민당 17석, 정의당 5석, 국민의당 3석, 열린민주당 3석으로 나타났다. 실제 3% 이상을 득표한 정당은 5개뿐이었다. 그러나 왜 이렇게 나뉘는지에 관해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생소한 명칭처럼 산출법이 복잡 난해하다. 선거가 끝난 뒤, 여러 곳에서 이런 본질적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도대체 이걸 왜 한 것인가?’



48.1㎝ 투표용지의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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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걸 더불어시민당 상임선대위원장(오른쪽)이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선 스티커를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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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알 필요가 있다. ‘연동형’은 ‘비례대표 의석이 지역구 의석과 정당 득표에 맞춰 연동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해 지역구 의석은 적지만, 정당 득표는 많은 정당을 배려하는 투표제도다. 한국적 현실에 적용하면, 정의당 같은 정당이 유리해진다. 왜냐하면 충성 지지층을 보유하고 있지만, 이들이 특정 지역구에 뭉쳐 사는 것이 아니라서 지역구 선거에서 정의당은 당선자를 배출하기 힘겹다. 지지표 대부분이 사표로 처리된다. 심상정 대표나 고(故) 노회찬 의원 같은 인지도 높은 정치인만 예외적이었다. 그러나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시행되면, 전국 곳곳에 있는 정의당 지지자들의 표가 힘을 발휘한다. 지역구 선거에서 당선자를 못 낸 만큼, 비례대표 의원 수 배정에서 우선권을 갖는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현실화시켜 교섭단체(20석)를 확보하는 것이 정의당의 꿈이었다.

정의당 이외의 소수정당들도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찬성이었다.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양당 구조에서 지역구 당선자를 낼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반면 전국에서 정당 득표 3%는 상대적으로 도전해볼 만하게 여겨졌다. 48.1㎝ 투표용지가 탄생한 배경이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의 전신)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응할 이유가 없었다. 지역구 당선자가 많을수록 비례대표 당선자가 줄어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보다, 지역구와 무관하게 정당 득표가 많은 만큼 비례대표 의원 수를 가져가는 기존의 ‘병립형’이 훨씬 유리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양당은 비례대표 의원 수가 0이 될 수 있었다.

다양한 목소리를 담을 수 있다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취지가 아무리 고귀해도, 정치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정치는 생물이다. 민주당에 아쉬운 상황이 생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숙원인 검찰개혁을 담은 사법 개혁안을 민주당은 어떻게든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태워야 했다. 2019년 4월 당시 국회 의석 분포상, 민주당 자력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민주당은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들에 사법 개혁안과 선거제 개편 법안의 ‘빅딜’을 제시했다. 사법 개혁안에 협조해주면, 선거제를 바꿔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이때 바른미래당(민생당의 전신) 손학규 대표는 유승민 계열 의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협조를 선택했다. 그는 2018년 12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주장하는 단식까지 했었다. 손 대표와 김관영 원내대표는 패스트트랙에 부정적이었던 자당 소속 사법개혁특별위원회 위원(오신환)을 찬성파(채이배)로 교체하는 논란까지 불사했다. 바른미래당과 정의당의 협조로 사법 개혁안은 궤도에 진입했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로 이어졌다.

이제 민주당이 약속을 지킬 차례였다. 당시만 해도 민주당은 2020년 4월 총선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형국이었다. ‘조국 사태’로 궁지에 몰린 탓이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2019년 8월 9일 지명된 이래 10월 14일 사퇴하기까지 문 대통령의 지지율을 40% 초반까지 하락시켰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민주당은 소(小)연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정의당, 민주평화당·대안신당(민생당의 전신) 등 진보 성향 정당들과 연합해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 식이다. 이때 합의 과정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변형된다. 비례대표 의석을 47석으로 종전처럼 유지하되, 이 중 30석을 정당 득표율에 따라 맞춰주는 연동형 캡 안에 넣었다. 그 반영률도 연동형의 절반인 50%만 반영하기로 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됐다. 나머지 17석은 기존의 병립형 비례대표 의석 배분을 존속시켰다. ‘누더기’ 비판을 들을 정도로 계산법이 복잡해졌지만,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정당들은 합의했다. 소수파 정당들은 ‘어쨌든 비례대표 의석을 늘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작동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록 불완전하긴 해도 최대 수혜자는 정의당일 줄 알았다. 실리를 위해 정의당은 조국 사태 때 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의당에 정의가 없다”는 여론의 실망을 감수했다. 결과적으로 이때 정의당의 오판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적 손실을 안겼다.



민주당의 궤도수정, 소연정에서 단독과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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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철 미래한국당 대표(왼쪽)가 4월 15일 총선 참패 직후 물러나는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를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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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이 정의당에서 멀어지는 가운데, 기상천외한 ‘지뢰’가 출현했다. 거대 양당이 ‘위성정당’이라는 기습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이다. 물꼬는 자유한국당이 텄다. 선거법 개정에 반대한 자유한국당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무력화하는 방편으로 미래한국당을 만들었다. 그러자 민주당도 셈법이 달라졌다. 코로나19는 국가적 재난이었지만, 방역 성공 덕분에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에 호재가 됐다. 심판론보다 안정론에 여론이 실리고 있었다. 중도층 표심이 당겨지고 있었다. 이런 기류를 포착한 민주당은 ‘소연정(지지 않겠다)’에서 ‘단독과반(이기겠다)’ 쪽으로 전략을 선회했다. 민주당은 위성 정당으로 더불어시민당을 만들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민주당의 ‘비공식 위성정당’ 열린민주당까지 생겼다. 민주당은 ‘분화 전술’로 정당투표제에 임했다. 더불어시민당이든, 열린민주당이든 어차피 합치면 민주당의 몫이었다. 겉으로는 갈등하는 듯 보여도, 결국 같은 편이었다. 실제 최종 득표율에서 더불어시민당은 33.3%, 열린민주당은 5.4%를 얻었다. 합치면 미래한국당(득표율 33.8%)보다 높았다.

게다가 미래한국당은 공천 잡음이라는 악재를 자초했다.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한선교 자유한국당 의원에게 미래한국당 대표직을 위탁했다. 그러나 한선교 체제에서 논란의 공천 리스트가 발표됐고,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까지 개입하는 사태를 초래했다. 결국 한선교에서 원유철 의원으로 대표가 교체됐다. 비례대표 공천 명단도 다시 만드는 촌극을 연출했다.

‘진보는 분열해서 망하고, 보수는 부패해서 망한다’는 철칙도 옛말이 됐다. ‘진보는 분열할수록 강해지고, 보수는 그다지 청렴하지 못한 데다 무능하고 분열까지 한’ 구도가 됐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기독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친박신당, 한국경제당 등이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났지만 1석도 얻지 못했다.

4·15 총선에서 정당득표율만 보면, 미래한국당은 범(氾) 여권 위성정당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구에서는 163(민주당):84(미래통합당)로 완패했다. 야당의 견제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미래통합당을 딱히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유권자들의 단호한 결정이었다. 큰 틀에서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총 180석)과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총 103석)의 의석수를 합치면, 전체 300석 중 283석에 달한다. 다당제를 하자고 만든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더 강력한 양당제가 소환된 역설적 상황이 연출됐다. 준연동형비례대표제 취지에 맞게 당선자를 낸 정당은 사실상 정의당(5석)과 국민의당(3석)뿐이었다. 소수정당 자립이나 제3지대론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철저히 부서졌다.

당선자 면면을 보면, 미래한국당은 윤봉길 의사의 손녀인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이 비례대표 1번을 받아 당선됐다. 탈북자 출신 인권운동가 지성호 전 나우(북한인권단체) 대표, 20대 총선에서 보수당 후보로서 전북에서 당선됐던 정운천 의원 등이 당선인 명단에 포함됐다. 더불어시민당은 ‘코로나19 알리기’ 활동을 해온 신현영 명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가 1번으로 당선됐다. 민주당 인재영입 1호였던 최혜영 강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김병주 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고(故) 김대중 대통령의 막내아들인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등도 당선인에 이름을 올렸다.

정의당은 류호정 IT산업노동특별위원장이 1번으로 당선됐다. 만 27세인 류 당선인은 21대 국회 최연소 의원으로 기록될 예정이다. 그러나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 이주민 출신 첫 국회의원이었던 이자스민 후보는 낙선했다. 국민의당은 계명대 동산병원 간호사 출신인 최연숙 후보가 1번으로 당선됐다. 안철수 대표의 최측근인 이태규, 권은희 의원까지 당선권에 들었다. 열린민주당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지지자인 김진애 도시건축가가 1번으로 당선됐다. 검찰개혁 추진론자인 최강욱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도 국회에 입성했다. 부동산 투기 의혹에 휩싸였던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지지하는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은 당선권에 들지 못했다. 단 1석도 얻지 못한 민생당은 존립을 걱정할 처지로 몰렸다. 손학규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은 “선거 결과에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며 사퇴했다. 우리공화당 서청원 의원, 한국경제당 이은재 의원, 친박신당 홍문종 의원, 국가혁명배당금당 허경영 대표, 기독자유통일당 김승규 전 국정원장 등도 외면받았다.



“현행 선거법은 성형이 잘못된 괴물”



선거가 끝난 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실패한 실험’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원래 이 제도는 “국민이 행사하는 1표가 최대한 공평하게 반영돼야 한다”는 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21대 총선에서 진보, 보수 진영 대립이 첨예할수록 양당 구조는 공고해졌다. 지역주의도 오히려 심화된 결과가 나왔다. 총선 직후부터 위성정당의 후유증은 노출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 미래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이 합당 시점을 놓고, 서로 ‘너희가 먼저 하라’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빠른 합당이 순리이지만, 오히려 비례 위성정당에 의원을 꿔줘서 교섭단체(의원 20명 이상)로 만드는 ‘정치적 거리두기’도 예상된다.

김형준 명지대 정치학과 교수는 “21대 총선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성형이 잘못된 괴물”이라며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했다. “비례 47석, 그중 연동형은 30석으로 캡을 씌운 제도는 세계적 웃음거리다. 순수하지 못하게 정치 공학적으로 만든 탓이다. 민주당의 공수처 통과를 위한 ‘미끼상품’에 정의당이 속은 것이다. 당시 민주당은 ‘다소 의석을 잃더라도, 소수정당의 원내 진입을 위해 용단을 내렸다’고 했었다. 미래한국당을 향해 ‘가짜정당이다. 국민의 선택권을 훼손한다’고 공격했었다. 그래놓고 자기들도 위성정당을 만든 것이다. 그나마 중앙선관위 안은 200(지역구):100(비례)이었는데 75석으로 줄였다가, 결국 47석으로 원상복구시켰다.”

대통령제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나라는 없다는 게 김 교수의 지적이다. 특히 ‘다당제는 선, 양당제는 악’이라는 잘못된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해답을 도출하는 것도 국회의 과제라고 하겠다.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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