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8 (목)

‘반도체법’ 최악 피했다지만… 韓기업 中 투자 불확실성 여전 [뉴스분석]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美, 반도체법 가드레일 공개 파장

당장 10월 수출통제 유예기간 끝나

국내기업 투자 ‘현상유지’ 전망 우세

21일(현지시간) 공개된 미국 반도체지원법 ‘가드레일’(Guardrail·안전장치) 세부 규정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세계일보

미국 상무부가 21일(현지시간) 반도체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의 세부 규정 초안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은 미국 반도체법에 따른 투자 보조금을 받으면 향후 10년간 중국에서 반도체 시설을 5% 이상 확장할 수 없게 된다. 사진은 2014년 문을 연 중국 시안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공장 전경. 삼성전자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가 더 어려워질 것이란 전망이다. 가드레일에서 한국 기업이 걱정했던 ‘10년 완전 봉쇄’가 아닌 제한적 증설 허용이 이뤄진 것은 다소 의미가 있지만, 향후 미국의 다른 규제 조치 등과 엮일 경우 사실상 중국에 대한 투자 금지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날 미 상무부가 공개한 가드레일 세부 규정은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경우 중국 투자를 금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조금을 수령하면 중국과 북한, 이란 등 우려 국가와 ‘중대 거래’를 금지하고, 이런 거래가 있을 때 미국 정부에 통보하도록 했는데 그 기준이 10만달러(약 1억3000만원)를 초과하는 경우다. 반도체 생산 기업의 규모를 생각할 때 ‘푼돈’ 수준인 이 기준에 맞춰 미국이 통제를 하겠다는 것은 신규 투자를 막은 것과 다름없다는 설명이다. 이는 유럽연합(EU)이 18일 공개한 핵심원자재법(CRMA) 등에서 주요 원자재 공급 업체에 대한 감독 강화를 위한 감사 수감 기준 매출액으로 삼은 연 1억5000만유로(약 2083억원)와 비교해도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첨단 반도체 생산시설의 경우 생산능력을 5%까지 늘릴 수 있는 투자를 허용한다는 내용도 제한적이라는 평가다.

중국 시안(西安)에 반도체 공장을 가진 삼성전자의 경우 2공장을 신설할 때 약 30조원을 투자했다. 앞으로는 이런 신규 공장 설립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상대적으로 기술 수준이 낮은 레거시(범용) 반도체 생산시설의 경우 생산능력을 10%까지 늘릴 수 있는 투자를 허용하고, 투자 금액에 제한을 따로 두지 않았는데 이는 한국과 대만 등 첨단 메모리·시스템 반도체 제조국의 주력 생산품이 아니다. 미 상무부는 이날 레거시 반도체 기준으로 로직 반도체는 28㎚(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D램은 18나노미터, 낸드플래시는 128단으로 정의했다. 이 기준조차 2년 한시 적용이다. 상무부는 2024년 8월9일까지 레거시 반도체 기준을 재지정하고, 향후 8년간 2년마다 개정하는 조건을 달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레거시 반도체 기준을 상향해 더욱 촘촘한 대중(對中) 견제망을 미국이 만들고, 이에 따라 우리 기업의 전략이 수정되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의 중국 활동은 사실상 풀기 어려운 고차원 방정식이 됐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임박한 도전은 오는 10월로 유예기간이 끝나는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10월 미국 정부로부터 대중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 조치 1년 유예를 받았다. 올해 연장이 안 되거나, 연장되더라도 조건이 강화되거나, 올해가 아닌 내년 혹은 내후년에는 유예가 끝나는 다양한 변수를 따져야 한다.

최근의 논의를 보면 미국이 미국산 반도체 장비뿐 아니라 일본과 네덜란드의 최첨단 장비까지 중국 수출을 차단할 것으로 보여 전망이 더욱 어둡다. 장비 수출이 막히면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는 물론이고 기술 지원 등이 차단되면서 중국 공장의 현상 유지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가드레일 조항과 별도로 보조금 신청 조건에서 포함된 기업 정보 공개·시설 접근권 요구, 초과 이익 공유 의무화 등의 사항도 우리 기업에 부담이다. 1억5000만달러(약 2000억원) 이상의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특정 초과 이익을 미국의 반도체 생태계 강화를 위해 공유해야 한다는 조항 역시 투자 논리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10년 동안 생산능력 5%를 늘리고 중국에 투자할 수 있겠느냐”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세계일보

미국 상무부.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미 상무부가 향후 60일간 가드레일 조항 등에 대해 의견 수렴을 하겠다고 밝힌 만큼 한국 정부는 반도체법과 관련해 우리 기업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미 정부의 기존 방침이 눈에 띄게 바뀌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반도체법은 전기차법(정식 명칭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성격도 다르다. 한국산 전기차 차별 조항의 경우 현대자동차그룹이 미국에 투자를 계획하고 있는 상황이라 미국 측도 우리 문제 제기에 일정 부분 공감을 표시했으나 반도체법은 미 정부가 세금을 들여 보조금을 지급하는 만큼 투자 기업이 정부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 분명하다. 미국이 반도체를 전기차와 달리 국가 안보 등 대중 견제 전략의 핵심 분야, 즉 산업 이슈보다는 동맹 전략의 일환으로 접근하는 측면도 부담이다.

이와 관련해 미 상무부 고위당국자는 가드레일 조항 발표 뒤 한국, 대만, 일본 3개국 언론을 대상으로 한 브리핑에서 “한국과 대만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도체법이 미국만의 이익을 추구해 미국에 투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많다는 주장이 있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한국의 반도체 기업들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업들에 속하고 우리는 진심으로 미국 반도체 산업에 외국인 투자가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반도체법 규정은 미국 기업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자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며 대응책을 모색 중이다. 이날 블룸버그통신은 중국이 자국의 최대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YMTC(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에 19억달러(약 2조4800억원)의 자금을 지원했다고 보도했다.

워싱턴·베이징=박영준·이귀전 특파원

ⓒ 세상을 보는 눈, 세계일보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