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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8 (목)

빚 피해 상속포기해도 손주에 대물림…바로잡은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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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전원합의체 선고를 앞두고 배석해 있다. 사진 대법원 법원행정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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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빚의 대물림의 고리를 끊는 판결을 내놨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고인의 자녀 전부가 상속을 포기하면 손자녀나 직계존속이 있더라도 배우자만 단독 상속인이 된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2015년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의 판결 등 종래 판례를 변경한 것이다. 이 판결로 고인이 남기고 간 빚을 자녀들이 상속 포기해도 그 빚이 손자녀에게 대물림되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됐다.

2015년 A씨가 빚을 남기고 숨지자 자녀들은 상속 포기를, A씨의 배우자는 자신이 받을 수 있는 재산 한도 내에서만 빚을 갚는 한정 승인을 신고했다. 그러자 A씨에게 받을 구상금 채권을 가지고 있던 서울보증보험은 2020년 A씨의 배우자와 손주 4명에게 빚을 갚으라는 승계집행문을 법원을 통해 보냈다. 상속 포기 신고를 하지 않은 손주들은 A씨의 배우자와 함께 공동상속인이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손주 4명은 A씨가 숨질 당시 미성년이었다.

손주 4명은 “할머니가 단독 상속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부산지방법원은 2020년 5월 기각 결정을 내렸다. “배우자와 자녀 중 자녀 전부가 상속을 포기한 경우에는 배우자와 손자녀 또는 직계존속이 공동으로 상속인이 된다”고 밝힌 2015년 대법원 판결이 근거였다.

이는 배우자에게 독자적인 상속인 지위를 주지 않은 우리나라 상속 체계에 뿌리른 둔 문제다. 법률상 배우자는 고인의 직계비속이나 직계존속이 있는 경우 이들과 함께 공동상속인이 되고, 직계비속이나 직계존속이 없는 경우에는 단독 상속인이 된다(민법 제1003조). 배우자의 상속 비율을 고정해둔 프랑스·독일·일본 등과 달리 다른 상속인의 유무와 수에 따라 상대적으로 비율이 정해지는 것이다. 2015년 대법원 판결은 민법 조항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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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하지만 전원합의체 다수의견은 2015년 판결이 법 조항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했다고 판단했다. 민법 제1043조에는 “어느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한 때에는 그 상속분이 ‘다른 상속인’의 상속분의 비율로 그 상속인에게 귀속된다”고 규정돼 있는데 대법원은 그동안 ‘다른 상속인’에 배우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석해 왔다. 이날 전합은 ‘다른 상속인’에 배우자가 포함된다고 해석해 A씨 사건과 같은 경우에 빚을 배우자가 단독 상속하고 손주들에게 대물림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다만 만약 고인의 배우자와 자녀가 모두 상속을 포기했다면 손주들은 별도로 상속 포기 절차를 밟아야 대물림을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실무에서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배우자가 한정승인으로 빚을 감당하는 게 일반적이어서 이날 판결로 빚이 손자녀에게 대물림되는 고리는 거의 차단된 셈이다.

전합은 상속을 포기하는 자녀들의 의사를 법조항 해석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상속포기는 부모가 남긴 빚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치이지 자신의 자녀에게 조부모의 빚을 떠밀기 위한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합은 판결문에 “손자녀나 직계존속이 배우자와 공동상속인이 된다고 보는 것은 당사자들의 기대나 의사에 반하고 사회 일반의 법감정에도 반한다”고 썼다.

그동안 실제로 A씨 손자녀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별도로 상속 포기 절차를 밟아야 빚더미에 앉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속포기 신고는 자신에게 빚이 대물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뒤 3개월 안에 해야 효력이 있다. 손자녀가 미성년인 경우가 많은데 그 부모조차 자녀들이 상속 포기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몰라 때를 놓치는 경우가 심심찮게 발생해 왔다. 전합은 “손자녀 또는 직계존속에게 별도로 상속 포기 재판 절차를 거치는 과정에서 채권자와 상속인 모두에게 불필요한 분쟁을 증가시키며 무용한 절차에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결과가 됐다”고 지적했다.

윤진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2015년 판결은 잘못 받아들인 법을 그대로 따른 결과”라며 “정작 일본은 이미 한참 전에 자녀가 모두 상속을 포기한 경우 배우자의 단독 상속을 인정하는 쪽으로 법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현소혜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부교수는 “아버지가 재산을 많이 남긴 집에서 어머니에게 유산을 몰아주기 위해 자녀들이 상속을 포기해도 2015년 판결대로라면 손자녀들이 공동상속인이 되는 구조”라며 “어머니가 단독 상속을 받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아둔 법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짚었다.

판례가 바뀌면서 관련 분쟁이 훨씬 간명해질 것이라는 기대도 나온다. 현 교수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자녀들을 상대로 소송하다 이들이 상속 포기를 하면 다시 손자녀들을 일일이 찾아내 소송을 하면서 소송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며 “향후 분쟁이 보다 신속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광득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는 “한 사건에 상속 포기자가 3~40명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며 “빚이 많은 서민이 법률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도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면 전합 판단은 일반인의 법감정과 부합하는 결과”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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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번 판결로 '빚의 대물림'의 작은 고리는 끊겼지만 근본적으로 상속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행법에 따르면 고인의 사촌 이내 친족이 모두 상속을 포기해야 빚의 대물림을 끊어낼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정법원에 접수되는 상속 포기 접수 건수는 매년 치솟는 추세다. 서울가정법원에만 지난해 4535건이 접수되면서 최고치를 경신했다. 2009년(2673건)에 비해 1.7배 늘었다.

상속 포기를 할 새도 없이 빚더미에 앉는 경우도 다반사다. 나보다 먼저 빚을 물려받을 뻔한 친척이 상속 포기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자신이 뒷순위 상속자라는 사실도 모르는 채 추심 서류를 받게 되는 것이다. 1인 가구나 이혼 가정이 늘어나면서 이런 경우는 더욱 늘었다고 한다. 심지어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이 채무를 알게 된 시점부터 3개월 안에 상속을 포기해야 했는데, 부모가 이 시기를 모르고 지나쳐 사회초년생이 되자마자 빚더미에 앉는 경우도 많았다. 당사자가 성년이 된 후에 알아차려 뒤늦게라도 한정승인을 할 수 있도록 법을 바꿔 길이 열린 건 지난해 12월부터다.

당장 4촌 이내의 방계혈족을 4순위 상속인으로 놓고 빚을 승계토록 하는 것은 재산권 침해라 위헌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헌재는 2020년 해당 조항(민법 1000조 1항 4호)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상태다. 당시 헌재는 “가족 간 친소 관계 등 주관적 요소를 일일이 고려해 상속인의 기준을 법률에 규정하기 어렵다”며 “4촌 이내의 방계혈족 당사자의 개인적 상황과 같은 우연한 사실관계 등이 중첩되어 발생하는 ‘결과의 불합리’를 지적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당시 헌재에 사건을 보낸 중앙지법은 “여러 사정으로 3개월 이내에 상속 포기 절차를 밟을 수 없는 4촌 이내의 방계혈족만이 고인의 빚을 대신 갚게 되는 것은 불합리하고, 국가의 사회적 약자 보호 의무에도 정면으로 위반된다”고 지적했지만 받아들여지 않았다.

오효정·김정연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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