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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1 (수)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84)하늘 길에 소소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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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가 스스로를 몸(身)․짓(行)․말(言)없이 하늘땅 우러러 가르치고, 스스로 나(我)․남(他)․몬(物)을 이루려 단단히 벼르지 않으며, 스르르 아래 아래로 드넓게 고루 두루 번져 저절로 베푸니, 안 보이고 안 들리고 쥐어 잡을 수 없어도 그 속이 확 알아지는 길(道)이 있다.

    알아차린 그 자리에 환빛으로 훅 열린 속알 우주!

    글로 쓰니 길이요, 말로 하니 길일뿐이다. 깨달아 알아차린 그 속알에 씨앗이 저절로 들임받음의 솟남을 무엇으로 다 밝힐 수 있을까. 밖이 아니라, 속에 속이 속으로 들어 말갛게 솟나는 속알의 밝고 맑은 환빛 길을. 그 참의 옹근 씨앗을.

    그러니 노자 늙은이는 “이름 없에 하늘땅이 비롯고”라고 말했으리라. 그저 무엇이라고 말하는 눈 깜짝 사이에 저절로는 끊기고 곧 그 자리에 무얼 하고픈 ‘싶뜻’(欲心)이 일어서리라. 안팎으로 말 트지 않아야 없이 솟는 ‘비롯’(始)이 조용히 이어진다.

    경향신문

    오직 저절로 사랑이 스스로요, 그러함이요, 모심이요, 낮힘이요, 빈탕이요, 산알이요, 씻음이요, 바름이요, 늘이요, 빛숨이요, 고요히 뚝 떠 솟은 알이다. 오직 사랑이 못다 할 밑동이다. 등걸의 꽃밑이다.


    아무 말 없으니 옳고 그름 따위가 드러나지 않아 너스르르 그러하고, 무얼 따져 벼르지 않으니 내 것 네 것 차리는 잇속 없이 나스르르 그러하고, 너나 없에 비롯이 서슬 퍼렇게 부들무릇 무지개를 틔운다.

    무지개 속알이 알아지는 길을 따라 마음 가온에 닿으면 집집 우주를 품은 그저 시원한 빈탕이다. 사려니 숲을 휘감아 불어 오르는 바람처럼 감한 빛 가득 아득 가아득 덩그러니 텅 비어 빈 빈탕. 아득한 그 빈탕에 그저 온갖 몬(物)을 짓고 일으키는 빛숨 하나 홀로 있을 따름이다. 서로를 끊고 넘어 선 자리에 오롯한 산알 빛숨 하나다!

    그 하나로 숨을 터 이어 이 예 이른 늘이니 늘로 느릿느릿 야물어 가는 길이다. 지금이 늘로 솟는 길은 가없이 커서 이어이어 가고 오는 여기에 옷독이(陽)와 움쑥이(陰)를 돌린다. 한아’로 숨 돌리는 옷독이와 움쑥이.

    맨 꼭대기에 맨 꽁무니가 하나로 힘입어 돌아가는 한 꼴 차림이랄까. 바로 그 없이 있는 맨에 가없고 끝없는 늘길(常道)의 오래(門)가 밝다.

    뻥 뚫린 빈탕에 솟구쳐 오르내리 들고나는 까마득한 야묾의 이제 여기!

    빈탕은 쌓아지지 않는다. 빈탕은 비워지지 않는다. 쌓아도 쌓아지지 않고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게 아니어서 앗을 틔워 살리고 짓을 키워 아우르는 어우렁더우렁에 야묾을 돌리는 ‘하실’의 사랑이 쉬지 않고 흐른다.

    가마득이요, 까마득으로 끝없이 넘실대며 스멀스멀 새나는 저절로 사랑이다. 저절로 사랑이 없이는 그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참(眞)에 오직 사랑이 솟소소

    올(理)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빔(虛)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알(德)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숨(氣)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얼(靈)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살(生)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물(水)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줄(經)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낮(下)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길(道)에 오직 사랑이 소소소

    왕(王)에 오직 사랑이 소소솟

    오직 저절로 사랑이 스스로요, 그러함이요, 모심이요, 낮힘이요, 빈탕이요, 산알이요, 씻음이요, 바름이요, 늘이요, 빛숨이요, 고요히 뚝 떠 솟은 알이다. 오직 사랑이 못다 할 밑동이다. 등걸의 꽃밑이다. 가온찍기로 으, 이, 아오(․)!

    빈탕에 마름 없이 늘 샘솟는 사랑이 하늘 길이다!

    다석이 한글로 바꾼 81월을 보자.

    경향신문

    여섯이 말을 끊는다. 끊어야 넘어 설 수 있으니 여섯은 이제 말을 접기로 한다. 속알이 말로 이루어지는 바로 그때는 그 말이 무엇이든지 이미 꾸민 말이다. 말에 이름이 비롯한다. 이름을 놓아야 없에 든다. 없에 들어야 비롯의 야묾이 보인다. 저 없이 솟은 깨끗한 바탈(本性)을 봄이다. 비로소 하늘 길에 소소소 숨 솟는다. 속알 빈탕에 무지개 번개가 만다라로 핀다. 알짬(精)이 든든하다.

    사랑이 : ‘믿븐말’은 믿음에 들어간 이의 말이다. 믿음직하고 미더워 미쁜 말이야. ‘미쁘다’로 쓰니 그냥 미쁜 말이라고 해도 될 거야. 미쁜 말은 한웋님과 더불어 묶인 말이니 그 말이 참 미쁘기 그지없어. 속으로 잘 영글어 익은 말이기도 하고.

    사슴뿔 : 입 밖으로 나온 미쁜 말이 아름답지 만은 안다네. 그런 말의 아름다움은 겉치레 겉치장이라네. 겉치레 겉치장이 어여쁘다고 속도 아름다울까? 미쁜 말도 속에 가만있지 않고 자꾸 새나오면 꾸며지기 마련이라네. 미쁜 말이 아름답지 만도 않고 아름다운 말이 믿을 말도 아닌 까닭이 여기 있다네.

    떠돌이 : 착한 말은 속 마음씨가 곱고 올발라 부드러운 말이야. 벼르는 말은 제 잇속만 차리는 마음으로 단단히 이르는 말이고 말이지. 착한 말을 이루려고 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별러야 하겠으나, 그러다가 벼르는 말이 나올 수 있어. 벼르는 것과 벼르는 말은 다르거든. 그러니 착한 말이 벼르는 것만도 아니고 벼르는 말이 착한 것만도 아닌 거야. 속알맘에 돌아가는 착한 말은 입이 없어.

    깨달이 : 참 아는 이는 속으로 느껴 깨달은 이야. 그런데 그이가 안다고 마음 쓰는 것이 과연 크고 너그러운 것일까? 마음 쓰는 게 크고 너그럽다고 속으로 깨달은 것일까? 참 아는 이는 속이 빈탕이야. 그이는 저절로 베풀지 결코 마음을 일으켜 무얼 하려고 하지 않아. 그러니 아는 이가 넓은 것도 아니고 넓은 이가 아는 것도 아닌 거야.

    늙은이 : 씻어난 이는 쌓아두지 않아. 쌓아두면 믿어지고 믿어지면 허깨비(偶像)니까. 이제 믿어진다 싶으면 바로 밑을 터 비워 버리는 거야. 미쁜 말 착한 말도 쌓아두지 말고 비워 버리는 거야. 참 안다고 앎을 쌓아두어서도 안 돼. 그래야 늘 새롭고 새로워. 씻어난 이는 늘 그 쌓아두지 않는 ‘새로움’을 가지고 하는 거야. 사이에 늘 솟는 움!

    어린님 : 사이에 늘 솟는 움이 ‘함없에 함’(爲無爲)이야. 씻어난 이는 사이 빈탕에 스멀스멀 새나는 사랑으로 함을 돌리지. 사랑은 이미 벌써 저절로 함이야. 함이 돌아감은 하고 안 하고의 생각에 있지 않아. 벌써를 가지고 돌리기 때문에 마음에 늘 앞서지. 사랑은 본디 그런 거야. 마음을 일으키면 이미 늦어버리거든. 쌓아두지 않고 벌써 남에게 했으니 그 자리는 더욱 빈탕일 수밖에. 그래서 제 더욱 텅 빈 빈탕을 가지는 것이지. 하면 할수록 더 덕 덤으로 비움이 크게 채워져! 그렇게 하늘 길은 늘 좋게 하고 언짢게 하지 않아. 씻어난 이의 길은 하고 다투지 않고 말이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 했으니까.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으니까.

    늙은이 : 하늘 길은 언제나 늘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해. 바르고 올발라. 그래서 온전하지. 참 알줄이 예 있어. 그럼 81월을 새겨볼까!

    경향신문

    ■김종길은
    다석철학 연구자다. 1995년 봄, 박영호 선생의 신문 연재 글에서 다석 류영모를 처음 만났는데, 그날 그 자리에서 ‘몸맘얼’의 참 스승으로 모셨다. 다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민중신학과 우리 옛 사상, 근대 민족 종교사상, 인도철학, 서구철학을 좇았다. 지금은 그것들이 모두 뜨거운 한 솥 잡곡밥이다. 함석헌, 김흥호, 박영호, 정양모, 김흡영, 박재순, 이정배, 심중식, 이기상, 김원호 님의 글과 말로 ‘정신줄’ 잡았고, 지금은 다석 스승이 쓰신 <다석일지>의 ‘늙은이’로 사상의 얼개를 그리는 중이다.
    ■닝겔은
    그림책 작가다. 본명은 김종민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큰 기와집의 오래된 소원>, <소 찾는 아이>, <섬집 아기>, <워낭소리>, <출동 119! 우리가 간다>, <사탕이 녹을 때까지> 등을 작업했다. 시의 문장처럼 사유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작가다



    ☞ 김종길의 다석 늙은이(老子) 읽기(83)작은 나라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303230700001


    김종길 다석철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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