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3.29 (금)

해커의 수십억 요구… 전자책 보안의 민낯[이호재의 띠지 풀고 책 수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e북, 한 번 뚫리면 피해 막심한데

표준 보안 시스템 합의조차 안돼

◇출판사를 위한 전자책 길잡이/한국출판인회의 지음/150쪽·무료·한국출판인회의

동아일보

이호재 기자


“어린이 ‘유괴 사건’을 수사하는 것 같다.”

경찰 관계자가 최근 일어난 온라인 서점 알라딘 전자책(e북) 해킹 사건을 알라딘 측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해커가 이민진의 장편소설 ‘파친코’(2022년·인플루엔셜), 정세랑의 장편소설 ‘보건교사 안은영’(2015년·민음사), 정유정의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2009년·은행나무) 등 5000여 권의 파일을 인질로 삼고 35억 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요구하는 모습이 유괴 사건과 똑 닮았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범인 검거보다 인질(e북)이 중요하다”며 “인질의 목숨(불법 유포)이 걱정돼 범인 검거와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했단다.

동아일보

‘출판사를 위한 전자책 길잡이’는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함께 출판계 양대 단체로 불리는 한국출판인회의가 출판사와 작가를 위해 펴낸 책이다. 2018년 e북으로 출간된 책으로, 현 상황에서 눈여겨볼 점이 많다.

‘출판사를 위한…’은 e북의 핵심으로 보안 장치인 ‘디지털 저작권 관리(DRM)’ 기술을 꼽는다. 종이책과 달리 파일로 유통되기 때문에 보안이 뚫리면 걷잡을 수 없이 피해가 커진다는 점을 경고한 것이다. 서점마다 다른 DRM을 쓰고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정부와 출판계가 2010, 2014년 두 차례 출판계 ‘표준 DRM’을 구축하려 했으나 서점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알라딘 DRM 보안이 취약한 것이 이번 사건의 원인이라면 ‘표준 DRM’ 무산이 문제점으로 지목될 수 있다.

‘북토피아’의 실패도 언급하고 있다. 1999년 약 120개 출판사가 자본금을 모아 설립한 e북 유통업체인 북토피아는 2010년 파산했다. 파산 과정에서 수천 개의 e북 파일이 파일 공유(P2P) 프로그램을 통해 불법 유통됐다. 해킹이 아닌 파산으로 인한 것이지만 e북 불법 유통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선 알라딘 e북 해킹 사건을 보는 듯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속 가능한 e북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된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e북 생태계는 불안정하다. 지난해 8월 출판유통전문기업 웅진북센은 국립국어원의 ‘말뭉치’ 구축 사업에 참여하면서 약 1만6000종의 e북 저작권을 무단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e북의 저작권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2021년엔 ‘90년생이 온다’의 임홍택 작가가 e북 인세 누락 문제로 출판사와 소송을 벌였을 정도로 인세 정산 역시 불투명하다. 알라딘 e북 해킹 사건을 계기로 보안 문제가 불거지면서 e북에 대한 신뢰도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물론 알라딘 e북 해킹 사건을 일으킨 건 해커다. 경찰 수사를 통해 조속히 불법 유통 파일이 회수되고, 해커가 검거돼 처벌받아야 한다. 다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지속가능한 e북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출판계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 동아일보 & dong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