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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한강의 얼음을 팝니다 – 여름을 시원하게 만든 특별한 장사[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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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 72

100년 전 사진으로 현재를 되돌아보는 백년사진입니다. 무더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더위를 버티는 방법은 지금이 훨씬 다양합니다. 이번 주 고른 사진은 얼음을 뜻하는 빙(氷)자가 여기저기 붙어 있는 가게 사진입니다. 1924년 8월 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얼음을 파는 가게가 더운 여름을 만나 장사가 잘 된다는 소식입니다. 가게를 ‘임시로 만든 집’이라는 의미에서 ‘가가’로 표현했었군요.

동아일보

1924년 8월 1일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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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만난 얼음 가가(假家)

도매값은 싼데 소매값은 작년과 같다.

중복허리가 되니 날도 무던히 덥다. 일기가 더워 갈수록 세월이 좋은 사람은 어름장사들이다. 대체 경성 시내에서 한 여름 동안에 소비되는 얼음은 보통 2만 돈은 넘어간다하며 이 가격은 금년 도매 시세로 보도라도 일 돈에 13원 50전 식으로 이만 돈 가격이 17만원 안에 들지는 않는다 하니 이것을 소매 가격으로 환상하면 적어도 2,3배는 넉넉하리라 한다. 그런데 작년 겨울 일기가 전에 없이 따뜻하여서 한강(漢江) 채빙(採氷)이 여의치 못하였던 고로 경성 시내에 있는 얼음도가 이십여호 중에 경성천연빙과 조선천연빈의 두 회사를 제한 외에는 저장한 얼음이 전혀 없을뿐더러 앞의 두 회사에서도 경성 시내에서 일년 동안 소비되는 2만돈(돈)의 얼음은 가지지 못하였는 고로 금년 여름 어름 값이 좀 비싸리라고 일반은 기우(杞憂)를 마지 않하였더니 사실은 그와 반대로 소매값이 작년보다 오히려 싸다는 기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그 이유인 즉 리(利)에 밝은 일본 사람의 얼음 장사들은 경성에 얼음이 부족한 것을 짐작하고 안동현(安東縣) 평북백마(平北白馬) 함남서호진(咸南西湖津) 등지로부터 얼음을 이입(移入)하여다가 경성시내에 퍼트려놓고 싸게 소매상에게 넘기기 때문에 이것을 본 조선, 경성의 두 천연빙(天然氷) 회사에서는 경쟁적으로 더 싸게 팔기를 시작한 까닭이라 한다. 그러나 소매값은 여전히 작년에 얼음이 비쌀 때와 같이 2백 여개의 소매상들은 ‘이찌고’ 같은 것에 별미만 조금씩 붙이면 의례히 한 ‘컵’에 20전 혹은 25전을 받는다.


●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해 여름에 사용하던 시절, 일본인들이 얼음 사재기에 나선 이유

냉동으로 인공 얼음을 만들 수 없던 시절, 서울 한강은 여름철에 쓸 얼음을 제공하는 중요한 자원이었습니다. 한강 채빙은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얼음 장사는 조선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겨울을 지탱한 중요한 산업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채빙은 주로 정부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채취한 얼음은 궁중과 관청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왕실에서는 더운 여름에 차가운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얼음을 애용고 왕실의 빙고는 철저히 관리되었으며, 얼음의 공급이 끊기지 않도록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채빙 산업은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얼음에 대한 수요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한강 일대에서는 대규모로 얼음을 채취하여 판매하는 얼음 장사꾼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겨울철 한강이 얼면 강에 나가 얼음을 채취하고, 이를 잘라 운반하여 도심으로 공급하였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100년 전에 겨울 날씨가 포근해서 한강에서 얼음 채취가 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돈에 밝았던 일본 상인들이 얼음 부족과 그에 따른 가격 폭등을 미리 계산해 추운 안동 지방(중국 심양) 등에서 미리 얼음을 채취해서 서울로 옮겨다 놓았는데 막상 여름이 되니 가격이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들이 운영하던 얼음 가게에서 할인 행사를 한 덕분이라는 기사 내용입니다.

● 위생 문제를 핑계로 얼음 산업을 규제한 일제. 조선 상인들의 대책은 조합 설립

1925년 1월 16일 기사도 한번 보시겠습니다.

얼음 사업에 대한 위생 규제 때문에 힘들다는 호소를 담고 있습니다. 한강을 생업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많은 노동자들의 생존 문제를 정치가 간섭해서야 되겠느냐는 내용입니다.



수백 년 이래로 조선인 전래의 유업인 빙고업(氷庫業)은 심동에 한강이 결빙하면 그 부근에 빙고를 건축하고 채빙 저장하였다가 그 다음해 7,8월이 되면 각 방면 수요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채빙시에 비용은 빙괴 한 개에 불과 3,4전의 운임이 있을 뿐이요, 별로 큰 자본을 필요치 아니하고 그 다음해에 상당한 시세를 만나면 빙괴 한 개가 70, 80 전 내지 1원 이상의 가격으로 매매되여 상당한 이익이 있는 영업일 뿐만 아니라 연강( 沿江)에서 어업은 빙에 대하여 여름철의 신선을 보호하나니 그럼으로 이제 이 빙고업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 따라서 어업을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겨울철을 당하여 노동자 실직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즉 빙괴채취로 연강에 유통되는 재화는 적어도 일 년에 7,8만원 내지 10만원에 달하는 까닭에 노동자는 이 시기를 소작인의 추수 시기와 같이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2,3년 이래로 당국이 그 허가를 아니하는 관계로 연강노동자들에게는 형언키 어려운 가련한 생활을 파급하게 되었다. 위정당국자가 위생이란 점에 치중하여 그 업에 간섭하는 것은 호의로 해석하여 이이를 제출할 여지가 없거니와 그러나 간섭에도 정도가 있지 아니한가. 반드시 거금을 투자하여 저장고를 설치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종래의 빙고가 비록 불완전하다 할지라도 오적물의 침입은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소호의 개량을 가하면 충분히 쓸 수 있고 또한 어떠한 창고에 저장한다 할지라도 4,5삭(朔) 후에 꺼내는 것은 일반인즉 종래의 사정과 일반의 정형을 참작하여 각 기업에 안(安)하고 원한이 없게 하는 것이 정치의 요강이라한다면 당국자의 좀더 반성하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끝으로 조선빙고업자에 향하여 일언으로 원하노니, 목전의 작은 이익에 현혹하여 경쟁의 길을 취하지 말고 각기 자본을 구합(鳩合)하면 상당한 사회나 조합을 성립하여 완전히 경영할 수 있으니 이리하여 선조부터 이어온 유업을 유지하고 실업에 우는 노동동포를 구하기를!

● 한강 얼음 채취의 흔적들

동아일보

일제강점기, 한강에서의 채빙(採氷). 한강 얼음 두께가 12센티미터 이상이 되면 톱으로 얼음을 채취할 수 있었다 / 1930년대.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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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냉장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게 됩니다. 전기 냉장고가 보급되면서부터 얼음을 자연에서 채취할 필요성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냉장고는 집집마다 설치되었고, 이에 따라 한강에서의 채빙 산업은 점차 쇠퇴하게 됩니다. 각 가정에 냉장고 한 두 대씩 있는 요즈음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60년 대까지만해도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보관해뒀다가 여름에 판매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동아일보 DB를 살펴보니 1980년대 초 거리에서 리어커로 얼음을 실어 나르는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때의 얼음은 자연빙이 아니라 인공빙이었습니다. 지금도 대형 식당 등에서는 얼음 공장으로부터 얼음을 납품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아일보

리어커에 싣고…. 오랜 가뭄과 계속되는 무더위로 얼음과 청량음료등 더위를 식히는 여름용품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불경기의 여파로 전체수요량은 예년에 비해 다소 떨어져 호황을 누리면서도 업자들은 걱정들. 1982년 7월 8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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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100년 전 얼음 가게 사진을 시작으로 한강에서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팔던 시절 풍경 사진 몇 장을 함께 감상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얼음과 관련한 여러분의 추억은 어떤 것이 있나요? 댓글로 남겨주세요. 이제 조금만 고생하면 장마와 무더위도 끝날 것입니다. 건강한 여름 보내시길 바랍니다.



누구나 스마트폰 카메라로 가족과 풍경을 멋지게 찍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에, 우리 사진의 원형을 찾아가 봅니다. 사진기자가 100년 전 신문에 실렸던 흑백사진을 매주 한 장씩 골라 소개하는데 여기에 독자 여러분의 상상력이 더해지면 사진의 맥락이 더 분명해질 거 같습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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