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잊었던 위대한 유산 '임군홍'
일제강점기 새 기회를 찾아 중국으로
간판·광고 제작하며 그림 그리기 몰두
'고궁' '중국인상'…이국적 풍경 남겨
한국전쟁 발발, 좌파논란 치이다 월북
목숨 걸고 작품 지킨 유족 덕에 빛봐
임군홍의 ‘고궁’(1940s 초반). 1939년 스물일곱 살의 작가가 중국으로 이주한 뒤 그렸다. 생업을 위해 정착했던 한커우에서 기차로 10시간 거리를 무릅쓰고 작품활동을 위해 줄곧 찾았던 베이징의 한 풍경이다. 먼 거리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세부적인 묘사보다 색감에 무게를 실어 짙어가는 어느 가을날 해 저무는 초저녁 고즈넉한 궁의 분위기를 실어냈다.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하는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Ⅰ’에 걸린다. 캔버스에 유화물감, 60×7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오는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없이 펼쳐낼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전시에 한발 앞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1948년 어느 날. 서울 종로구 명륜동 한 가정집에 별안간 경찰이 들이닥쳤다. 화가 임군홍(1912∼1979)을 검거하기 위해서였다. 최승희(1911∼1967·무용가)를 그린 그림이 문제라고 했다. 우순부(지금의 교통부)의 신년 달력을 제작하면서 넣은 그림이었다. 2년 전 월북한 최승희가 썼던 갓이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붉은색이라는 점, 갓끈에 소련연방을 의미하는 숫자의 구슬을 넣었다는 점, 부채에 38선을 상징하는 선을 그렸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화가는 체포됐고 달력은 그 즉시 전국에서 모두 수거됐다. 황당한 해석이 그대로 증거가 되던 시절이었다. 한 아내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였던 서른여섯 살의 임군홍은 이 일로 수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임군홍은 딱히 정치적으로 주의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미술가였고 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이었다. 아니다. 특별하긴 했다. 사상적인 면이 아니라 미술적인 면에서. 중국과 조선을 오가고,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을 넘나들고, 서양의 여러 모더니즘 경향을 두루 아울렀던 독특한 근대기 예술가였다는 점에서 말이다.
‘중국의 시카고’ 한커우에 7년 정착…베이징 오가며 작품활동
미술 좀 한다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일본으로 떠나던 1930년대, 임군홍은 중국으로 향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대륙을 차지하려는 야욕에 불타던 일본이 조선인의 중국 이주를 적극적으로 독려하던 때였다. 1939년 스물일곱의 임군홍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시대의 흐름에 용감하게 올라탔다. 넓은 중국 중에서도 임군홍의 선택지는 후베이성의 한커우(오늘날의 우한)였다. 우리에겐 코로나19의 발원지로 익숙한 지역이지만 그때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교통의 요지로 꼽혔다. 한때의 별명이 ‘중국의 시카고’였을 정도다. 임군홍은 거기에서 내리 7년을 살았다.
‘중국인상’(1940s)은 그가 살던 한커우 풍경을 그린 것이다. 당시 한커우 최고 번화가 골목에서 임군홍은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그림을 그리고, 장을 보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상업미술회사도 운영했다. 각종 간판이나 도안, 버스광고, 벽화광고 등을 맡아 그리는 사업체였다. 중국으로 이주하기 전 경성에서 운영하던 ‘예림스튜디오’와 비슷했다. 중국에 남아 있던 조선인 서화가의 작품을 매입해 경성에 가져다 팔기도 했다. 그의 고객 중에는 간송 전형필(1906∼1962)도 있었다. 사업은 꽤 성공적이었다.
한커우에 머무를 때 임군홍은 베이징을 여러 차례 여행했다. 기차로 족히 10시간은 걸렸을 길을 수차례 왕복하며 북해공원, 자금성, 이화원 같은 명소를 그리고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한커우에서 평범한 삶의 모습을 소재로 삼은 것과 달리 베이징에서는 크고 웅장한 건축물들을 화폭에 옮겼다. 어느 가을 초저녁 무렵 중국의 거대한 궁을 그린 ‘고궁’(1940s 초반)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한커우의 ‘중국인상’에서는 화가가 풍경 안에 폭 들어가 있다면 베이징의 ‘고궁’에서는 화가가 멀리 떨어져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 거주자로서 경험하는 장소와 여행자로서 바라보는 풍경, 그 차이를 임군홍은 이렇게 풀어낸 것이다.
임군홍의 ‘중국인상’(1940s). 작가가 월북한 뒤 유족이 지켜온 유화작품 130여 점 중 한 점이다. 중국 한커우에 머무를 당시 이국적인 거리 풍경을 담아냈다. 차남 임덕진은 작품을 이렇게 해석했다. “긴 그림자를 드리운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을 엄마와 아이가 걸어가고 있다. 아이는 집에 가기 아쉬운 듯 뒤를 돌아본다. 하루 종일 같은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버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캔버스에 유화물감, 91×73㎝.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임군홍의 작품은 다양하다. 풍경화, 정물화, 인물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았고 그림마다 다른 화법을 사용했다. 고전적인 것부터 인상주의나 야수파, 표현주의까지 서양의 현대미술을 두루 아울렀다. 각각의 방식을 섭렵한 뒤, 그리는 대상에 맞는 방식을 자유자재로 사용한 것이다. 그만큼 재주도 좋았고 실험정신도 강했다.
조국이 광복을 맞은 이듬해, 임군홍은 중국에서 태어난 자녀를 데리고 부인과 서울로 돌아왔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그의 삶은 비슷했다. 여전히 그림을 그리며 돈을 벌어야 했다. 전시회에 그림을 출품하고 ‘고려광고사’를 운영하며 기차역 대합실 광고를 도안하고 인쇄하는 일을 따냈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갔으나 결국 그의 발목을 잡은 것도 그 사업이었다. 그에게 곤욕을 치르게 한 최승희 달력을 제작한 것이 이때였던 것이다.
주위 차가운 눈초리 견디며 긴 세월 작품 지켜낸 유족
작가는 북으로 갔지만 작품은 남쪽의 가족에게 남았다. 그의 부인은 가장을 대신해 다섯 남매와 시어머니, 몸이 아픈 시아주버니를 돌봤다. 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고 집 안에 남은 물건을 몽땅 내다 팔았다. 그러면서도 남편의 작품은 목숨처럼 지켰다. 유품 하나 버리지 않았다. 내일이라도 돌아올 것 같았기에. 분단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임군홍의 부인이 타계한 후에는 그의 차남 임덕진(77)이 유작을 보존해 왔다. 아버지와 헤어질 때 세 살이었다. 기억은 흐릿해도 사명감은 뚜렷했다. 궁핍했던 시절에도 아버지의 작품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해가 들지 않는 북향의 방에 작품을 보관했고 임군홍이 사용하던 종이와 화구박스, 보던 책도 간직했다. 온습조절을 위해 지금도 작품이 있는 방에는 난방을 하지 않는다. 임군홍의 대표작 다섯 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도 그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