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성 원통으로 기하추상 선도한 '이승조'
홍대스승 김환기 통해 추상 접한 뒤
냉철한 화면 선택해…'핵' 연작 시작
색·형태·질감 전부인 '진짜'추상으로
기계화한 1960~70년대 시대상 비춰
49세 이른타계…평생작품 100여점뿐
이승조의 ‘핵 No.86-29’(1986). 1980년대 초반 이후 눈에 띄게 변화한 화면을 확인케 하는 작품이다. ‘파이프’라고 불린 원통의 자리에 규칙적인 단색의 띠가 들어서며, 이전 시기의 입체적 공간 구성과 단일 색면 구성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해낸 조형성이 도드라진다. 이 시절의 변화에는 1983년 경기 안성에 마련한 스튜디오가 있다. 작품 크기의 확장과 더불어 작은 캔버스에서 벗어나 색띠든 원통이든 프레임 밖으로 끝 모르게 뻗어내려 했던 원대한 바람을 마침내 이뤘다. 하지만 고작 7년뿐이었다. 지난 5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개막한 ‘MMCA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에 걸렸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226.8×181.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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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사는 일을 돌아보니 그랬습니다. 지켜내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오롯이 세월을 지키는 일 말입니다. 한국미술이 먼저 떠오릅니다. 척박한 세상살이에 미술이 무슨 대수냐고, 그림이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데일리가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그 쉽지 않았던 한국근현대미술 100년을 더듬습니다. 이건희컬렉션을 입고 더욱 깊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섭니다. 5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과천에서 ‘MMCA 상설전’이란 타이틀 아래 미련 없이 펼쳐내는 300여 점, 그 가운데 30여 점을 골랐습니다. 주역을 찾진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리를, 오롯이 세월을 지켜온 작품을 우선 들여다봤습니다. ‘열화’입니다. ‘뜨거운 그림’이란 의미고, ‘식을 수 없는 그림’이란 의지입니다.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께 다가섭니다. <편집자 주>
[정하윤 미술평론가] 군더더기 없는 형태, 정교하게 나뉜 색면, 금속처럼 매끈한 표면. 파이프다! 아니 금속 배관인가. 그런데 좀 이상하다. 차가운 기계음이 들리지 않는다. 침묵과 고요한 긴장감만 화면에 가득하다. 제목도 의외다. ‘핵.’ 핵이라니 대체 무슨 뜻일까. 파면 팔수록 아리송한 작품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보기 드문 기하추상회화의 길을 고집했던 화가 이승조(1941∼1990)의 것이다.
194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남하한 이승조는 오산중학교 시절 선생님의 권유로 미술반에 들어갔다. 거기서 수채화와 유화를 배운 것이 미술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렇게 실력을 키워가던 중에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59년 굴비를 섬세하게 그린 정물화로 ‘제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입선했다. 화가가 되고 싶은 누구나, 아니 기성 화가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출품하던 국가 주도의 전람회였다. 여기에 입선함으로써 이승조는 큰 나무가 될 떡잎임을 일찍이 입증했다.
이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하면서 교수로 근무하던 김환기(1913∼1974)나 한묵(1914∼2016) 같은 거장들로부터 추상회화를 접했다. 고등학생 때 그렸던 정물화처럼 사물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그림이 점점 낡은 양식으로 느껴졌다. 4·19혁명을 겪은 동료 학생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미술은 추상회화란 인식이 퍼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구체적인 형상은 배제한 채 오직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질로만 채운, 이른바 ‘뜨거운 추상’의 시대가 열렸다. 이승조는 조용히 그 추상의 흐름에 올라탔고, ‘제11회 국전’에서는 추상화로 입선작에 이름을 올렸다.
보수적 ‘국전’서 기하추상으로 네 차례 연속 수상…‘전무후무’
졸업 후 이승조는 조금 다른 노선을 택했다. 추상화 중에서도 감정적이고 격동적인 회화 대신 이지적이고 냉철한 회화를 택한 거다. 그의 대표작 ‘핵’ 시리즈가 이때 시작됐다. 화면은 급속도로 차가워졌지만 그 안의 긴장감은 고조됐다. 반응은 뜨거웠다. “우리 화단에서 드물게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을 밀어붙인 화가” “논리적 전통이 희박한 한국 현대미술에서 보기 드문 존재”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뒤따랐다. 1968년 ‘제17회 국전’에서 ‘핵 F90’으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한 그는 1969년에는 특선, 1970년에는 문화공보부장관상, 1971년 특선까지 무려 네 차례 연속으로 큰 상을 거머쥐었다. 한 심사위원은 “대통령상감”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후문도 전해졌다. 보수적인 ‘국전’에서 기하추상이 연달아 이렇게 큰 상을 탄 건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승조의 ‘핵 G-999’(1970). 세 개의 캔버스를 연결해 한 작품으로 구성했다. 후기로 갈수록 사라져간, 적·청 등 원색을 들인 드문 작업이기도 하다. 푸른 원통의 규칙적인 반복이 꿈틀거리는 율동미를 만들고 있다. 일생동안 놓지 않은 ‘파이프’ 형상을 두고 작가는 기차여행 중 망막에 얼핏 스치는 강렬한 인상을 담아냈다고 그 처음을 설명한 적이 있다. “미묘한 감동에 휩싸여 이틀 밤을 꼬박 새우며 마음에 남은 이미지를 조작해 완성했다”고 했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94×112×(2), 192×111㎝.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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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게임은 이후부터다. 채색은 더 집요했다. 이승조는 먼저 종이를 접어 화면 위에 대고 수직·수평·사선 등의 밑그림을 연필로 그렸다. 그런 다음 종이테이프를 이용해 색면 하나하나를 구획하고 각각의 면에 다른 색을 올렸다. 평균 열 번 이상 반복해 칠했다. 표면이 점점 더 매끄러워지고 마침내 붓의 흔적조차 사라질 때까지 그의 붓질은 멈추지 않았다. 색을 다 올린 뒤에는 사포를 들었다. 표면을 갈아 매끄럽게 만들어 금속의 질감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완성된 화면은 공장에서 갓 찍어낸 공업 제품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사용한 모든 재료는 늘 최고급만을 고집했다. 대학 4학년을 앞두고는 등록금까지 몽땅 털어 재료를 산 탓에 결국 휴학까지 했을 정도였다. “최고의 작품은 최상의 재료에서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입체적인 원통 형태와 금속처럼 반짝이는 느낌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파이프 그림’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승조는 파이프를 그린 적이 없다. 그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형태가 만들어내는 리듬, 그로 인해 확장하는 공간이었다. 작품명인 ‘핵’도 그런 생각에서 나왔다. 여기서 ‘핵’은 ‘미술의 핵심’이란 뜻이다. 이승조는 어떤 사물이나 이야기 없이 색과 형태, 질감 같은 순수한 조형요소만으로 미술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던 거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말 그대로 ‘진짜 추상미술’이다.
이승조의 ‘핵 G-99’(1968). ‘미술의 핵심’이란 뜻으로 쓴 연작명 ‘핵’은 작가 일생 화업을 지탱한 기둥이다. 1967년 최초의 ‘핵’을 발표하고 4개월쯤 지나 10번째 ‘핵’ 연작에 처음 나온 원통은 이내 작가의 주요 조형언어가 됐다. 당시 국내 화단의 앵포르멜로 대표되는 ‘뜨거운 추상’에 대적할 ‘차가운 추상’의 등장이었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62×13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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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호 발사 본 뒤 우주공간 의식…뻗어가는 ‘핵’ 연작으로
작품에 대한 해석도 시대를 반영하기는 마찬가지다. 1970년대에 들어 이승조의 ‘핵’은 동양적 사유를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기보다 내면으로 침잠하는 그의 작품에서 동양인의 삶의 태도가 엿보인다는 해석이었다. 금속성이 강한 그림을 동양성과 연결짓는 게 다소 낯설 수도 있다. 하지만 민족성과 전통이 강조되던 1970년대 한국의 시대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런 해석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결국 평론 또한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승조는 단 한 번도 눈앞의 사물이나 시대의 이념을 좇은 적이 없다. 그가 추구한 것은 오직 형태와 색, 다시 말해 미술의 본질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철저하게 추상적인 그의 그림이 오히려 그 어떤 작품보다도 예리하게 사회를 비추고 있다.
작가 이승조. 국내 화단에선 보기 드문 기계미학적 추상회화를 일궈낸 작가는 불꽃처럼 살다가 마흔아홉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족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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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조가 평생토록 남긴 작품은 오직 100여 점뿐이다. 유족은 그 소중한 작업이 흩어지거나 잊히지 않도록 오랜 시간 소장처를 미술관으로 한정하며 엄격하게 관리해 왔다. 캔버스 앞에만 서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작가의 마음을 알기에, 그가 남긴 작업의 가치를 지키려는 마음에서였다. 덕분에 그의 그림은 본질에 대한 굳건한 집념과 시대의 흔적을 간직한 채 차갑고도 강렬하게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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