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규모 무관한데 엉뚱한 해결책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20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지방행정전산서비스 장애 대책본부 회의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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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발생해 3일 동안이나 디지털 행정서비스를 마비시킨 초유의 행정망 먹통 사태에 대해, 정부가 라우터(L3) 장비 일부 포트 고장을 장애 진원지로 지목했으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대기업의 공공 소프트웨어(SW) 사업 참여 제한을 대폭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 L3 라우터 장비 일부 포트 이상이 대기업-중소기업 기술 격차?
정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 격차 탓에 중소업체가 구축하고 유지보수하는 공공 전산망에서 자주 장애가 발생한다는 논리로 대기업의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참여 확대의 필요성을 언급한다. 하지만 정부가 이번 행정망 먹통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한 ‘장비 부품 이상’은 참여 기업의 규모나 기술력과는 별 상관이 없다. 한 중견 시스템통합(SI)업체 관계자는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명확하다. 행안부가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못 했고, 장비가 노후화됐다는 것이다. 장비 노후화 문제는 유지보수 참여 기업 규모가 달라진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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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업 참여 길 막혀 있다고?…“예외 허용 느는 추세”
정부는 2013년 소프트웨어진흥법을 개정해 대기업 계열사들의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참여를 제한했다. 사업 규모가 1천억원을 넘는 경우에만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다만, 국가안보·인공지능(AI)·빅데이터 등 신기술 적용이 필요한 분야는 예외적으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승인을 거쳐 대기업 참여를 허용했다. 대기업의 참여가 원천 봉쇄돼 있지 않다는 뜻이다.
대기업의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참여 범위와 규모는 갈수록 확대됐다. 2013년 국방·외교·치안·전력 등의 분야에 적용되던 대기업 참여 예외 허용 범위는 2015년 신기술, 2020년 수출 및 민간투자 등으로 확대됐다. 대기업 참여 허용 금액(총액)도 2016년 5265억원에서 2020년에는 1조4444억원까지 불어났다. 2020년 기준 전체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중 28.5%(금액 기준)가 대기업 몫으로 돌아갔다.
대기업 참여 제한 제도는 일감 몰아주기와 저가 입찰 등 불공정한 경쟁 방식으로 공공 소프트웨어 산업 생태계가 악화하고 있다는 지적에 따라 도입됐다. 중소·중견업체들은 “안 그래도 대기업 예외 사업 허용 범위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 안팎에서 거론되는 ‘사업 규모 700억원 이상’으로 기준을 완화하면 중소·중견기업 모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소연한다.
한 시스템통합업체 관계자는 “대기업 참여 제한 전에는 대기업으로부터 그저 일감 받아 장비나 인력 공급하는 것으로 끝냈다면, 제도 도입 뒤에는 10여년 동안 중소·중견기업들이 직접 사업을 수주하면서 경험을 쌓고 기술력을 높여왔다. 700억원 이상 사업으로 기준이 완화된다면 대기업이 무조건 들어온다는 거로 봐야 하고, 그렇게 되면 그동안 성장해온 중소·중견기업들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디지털 행정서비스 개발·구축 사업에서 기술은 곧 인력이고, 현재 대기업 참여 제한 때문에 오히려 대기업 쪽에 있던 우수 인력이 중견기업으로 오기도 한다. 좋은 인력들을 많이 확보한 상태인데, 대기업 참여 제한이 풀리게 되면 중소·중견기업 쪽 우수 인력들이 대기업으로 빠져나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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