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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밤에 내가 좋아하는 번역가 홍한별의 북토크를 진행했다. 사람들은 번역가를 자주 비난한다. 옛날엔 직역이라서 욕했고 요즘엔 의역이라서 욕한다. 그러나 순수 언어라는 게 있고 그걸로 쓰인 작품이 있다고 가정하면 특정 언어로 쓰인 작품은 모두 근원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게 발터 베냐민의 생각이다. 번역은 원문에 갇힌 순수 언어를 해방시키기 위한 (불가능한) 시도이고, 번역이 도달하고자 하는 건 원문 그 자체가 아니라 원문이 애초 되고자 한 그 무엇이다. 원문 언어와 번역 언어가 “보다 큰 언어의 파편으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은 둘의 대결을 생산적인 것으로 보게 한다. 생산적 대결 관계를 뜻하는 ‘아고니즘’(agonism)을 보통 ‘경합’으로 옮긴다. 맞수를 존중하는, 그러나 치열한 대결. 번역가들은 서로 경합할 뿐만 아니라 원문과도 경합한다.
경합들 l 샹탈 무페 지음, 서정연 옮김, 난장(2020) |
북토크가 끝나고 나서야 윤석열씨가 출소하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윤석열씨의 복귀도 문제지만, 지지자들에게 격려가 됐다는 것도 걱정스러웠다. 아고니즘의 반대쪽에 안타고니즘(antagonism)이 있고 이를 ‘적대’라 번역한다. 경합과 달리 적대는 맞수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궤멸시키기 위한 것이다. 윤석열씨는 바로 그 일을 (지지자들과 함께) 하려고 했다. 그는 파시스트다. “중요한 것은 갈등이 적대의 형태가 아니라 경합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샹탈 무페의 ‘경합들’에는 “Der Feind ist…”(‘적은…’)로 시작하는 독일어 시구가 제사(題詞)로 적혀 있다. “적은, 형상을 가진, 우리 자신의 문제다.” 우리 자신의 문제가 육화된 것이 적이다. 그런 적은 죽일 수도 없고 죽여서도 안 된다. 그런데 적을 죽이려 하는 적과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br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
신형철 l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인생의 역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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