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상 위게ㆍ피에르 요바노비치 인터뷰
24일까지ㆍ국립오페라단 ‘피가로의 결혼’
국립오페라단 ‘피가로의 결혼’을 연출한 뱅상 위게와 무대, 의상 디자인을 맡은 세계적 디자이너 피에르 요바노비치 [국립오페라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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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단 하루, 고작 24시간 동안의 ‘광란 (狂瀾)의 하루’(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원제)가 시작된다. 오페라에선 흔치 않은 회전 무대가 각기 다른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의 공간을 드러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계단과 높은 구조물, 뿌리 깊은 계급주의를 상징화한 곳곳의 무대.
주인공은 알마바바 백작의 충직한 하인 피가로. 피앙세 수잔나와의 행복한 결혼을 앞두고 신혼방 구상에 한창인 그에게 날벼락이 떨어진다. 깨어있는 귀족인 줄 알았던 ‘주인님’이 하녀 신분인 그의 피앙세에게 ‘초야권’(중세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 보호받고 있는 농노의 딸에 대한 처녀성을 취하는 권리)을 행사하려는 구린 속내를 알아차리게 된 것.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피가로는 ‘결혼 사수’를 위해 기막힌 계획을 세운다. 최하위 계급들의 ‘갑을 향한 반격’이다. 돌고 도는 회전무대 위에서 미쳐 날뛰는 하루 동안의 소동은 웃음을 가장한 한 편의 사회극이다. 국립오페라단의 ‘피가로의 결혼’(3월 24일까지, 예술의전당)이다.
무대를 매만진 두 주인공은 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로 이른바 ‘프렌치 럭셔리’의 대명사인 피에르 요바노비치와 그를 ‘무대의 세계’로 이끈 뱅상 위게 연출가다. 2023년 스위스 바젤극장에서 ‘리골레토’ 무대로 호흡을 맞춘 ‘오페라계 콤비’의 두 번째 협업작이 바로 한국에서 올라가는 ‘피가로의 결혼’이다. 두 사람과 함께 장장 200분(인터미션 포함)에 달하는 긴 이야기에 꽉꽉 채워진 음악은 다비트 라일란트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이 지휘한다.
국립오페라단 ‘피가로의 결혼’ 중 바빌론의 지구라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착안한 구조물 [국립오페라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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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은 ‘피가로의 결혼’에서 시작됐다.” (나폴레옹)
첨성대 같기도, 고대 건축물 같기도 한 둥글고 높다란 건축물 위로 수잔나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선율을 노래한다. 재치있고 명민한 하녀 수잔나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지배계급 백작을 속이기 위해 부르는 사랑의 아리아. 피에르 요바노비치는 “바빌론의 지구라트(Ziggurat)에서 영감을 얻은 구조물”이라고 했다. 이번 ‘피가로의 결혼’은 ‘지구라트’라는 영감의 씨앗이 중요한 방향성을 결정했다. 이 안엔 권력의 전복과 권력을 향한 조롱, 인간의 숨은 욕망이 담긴다.
지금도 음악가들이 최고의 오페라로 꼽는 ‘피가로의 결혼’은 프랑스 작가 피에르 보마르셰가 1781년 발표한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모차르트와 로렌초 다 폰테(대본)가 만든 작품이다. 파리 오데옹 국립극장에서의 원작 초연 당시 밀려든 인파로 인해 3명이 압사했을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오페라는 중세 봉건시대 악습인 ‘초야권’의 횡포를 휘두르는 부도덕한 귀족들을 겨냥한다.
뱅상 위게는 “구시대의 유물인 ‘초야권’은 현대엔 사라졌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현실은 여전히 존재한다”고 했다.
그는 “미투 운동이 커지기 전의 연출작은 (지금과는) 해석의 방향성이 달랐다”며 “현재도 프랑스 예술계 전반에선 미투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며 위계에 의한 폭력은 모두가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초야권은 악습이라고 인식하는 시대의 오페라에선 그것(초야권)을 어떤 방향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했다.
연출가의 해법은 ‘인간과 삶’ 자체에 있었다. 인간은 하나의 모습이나 특질로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진 존재로 보여주고, 그들이 그려나가는 삶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초점을 뒀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의 집은 하나의 작은 사회예요. 이곳에 사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을 단순히 선악(善惡)가 호오(好惡)의 이분법으로 규정하거나 흑백논리로 가룰 순 없어요. 누구에게나 지배와 권력을 향한 욕구가 있으니까요. 모차르트와 다 폰테는 우리 인생은 굉장히 복잡하고 그래서 흥미롭다는 메시지를 오페라에 아주 영리하게 담고 있어요. 이 안에서 우린 다 함께 살아나가야 하죠. 갑을 관계로 대립해도, 결국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니까요.” (뱅상 위게)
국립오페라단 ‘피가로의 결혼’ [국립오페라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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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최고 수준의 프랑스 미감(美感)…“추상과 리얼리즘 사이 ‘선의 미학’”
‘우아한 프랑스 감성과 유머’, ‘새로운 감각의 럭셔리’….
패션으로 시작해 인테리어, 가구, 건축까지 확장한 세계적 디자이너 피에르 요바노비치를 따라다니는 수사다. 이 오페라가 더 특별해진 것은 요바노비치가 무대와 의상을 진두지휘했다는 점 때문이다.
무대는 상상 가능하고, 구현가능한 그 이상의 오페라를 보여준다. 지금껏 한국 오페라 무대에선 볼 수 없던 ‘독보적 미감’이 곳곳에 묻어나 새로운 시각 경험을 준다. 두 사람은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아방가르드하고 모던하며 심플한 프랑스 느낌”이라고 했다.
요바노비치가 구현하고자 하는 무대엔 그의 디자인 철학이 녹아있다. 그는 “오페라의 세트는 영혼과 음악, 캐릭터를 반영할 때 가장 강력하다는 것을 안다. 무대의 세트 디자인은 기능적이어야 하고, 행위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것은 언제나 ‘스토리텔링’이다. 이번 무대에서 그는 “추상과 리얼리즘 사이”에서 답을 찾아갔다. ‘피가로의 결혼’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국립오페라단 ‘피가로의 결혼’ [국립오페라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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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그의 무대는 계급사회의 권력구조와 계급 타파의 욕망을 함축한다. 실내 디자인이나 건축에서 추구해온 요바노비치의 ‘선의 미학’이 무대와 의상 곳곳에 묻어난다. 그는 “구조적으로 선을 단순화하면서도 시대에 구애받지 않은 디자인, 심플한 라인에 기하학적 터치를 더해 단순하지만 단조롭지 않은 디자인으로 무대를 만들었다”고 했다.
‘오페라 콤비’인 두 사람이 추구하는 특질들은 적절히 섞여 새로운 형태의 교집합으로 태어났다. 계단은 그간 위게가 자신의 무대에서 즐겨 쓴 방식이다. 그는 “영화 ‘기생충’을 굉장히 흥미롭게 봤다. 영화 속 저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그것이 요바노비치와 만나 ‘나선형 계단’ 형태로 만들어져 서로를 내려다보고 올려다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촌극은 조명을 통한 태양의 변화로 시간의 흐름을 담아낸다. 위게는 “오페라 말미 등장할 정원은 이 오페라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동시에 가장 중요한 공간”이라고 했다.
오페라를 위해 요바노비치는 53벌의 의상을 제작했다. 모든 의상은 한국에서 원단을 구매해 완성됐다. 권력 구도 안에 놓인 다양한 인물들의 의상은 한복의 매듭과 저고리 디자인에서 착안, 한국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스타일로 태어났다.
요바노비치는 “한국의 전통의상인 한복은 물론 동시대 한국 의상의 독창적인 패턴과 재단 방식에 영감을 받았다”며 “어떤 조명이나 각도에선 완전히 프랑스 스타일이나, 어떤 면에선 한국의 전통의상처럼 보이도록 중간 지점의 무언가를 찾아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국립오페라단 ‘피가로의 결혼’ [국립오페라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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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도 몰랐던 ‘진실한 순간’ 마주할 것…“행복을 발견하는 시간이길”
두 사람은 교집합이 많다. 예술계에서 ‘공통의 친구’를 가졌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취향’을 공유했다. 강아지를 키우는 위게와 고양이를 키우는 요바노비치는 굳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 눈에 알았다고 한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모든 예술적인 것과 감정에 있어 같은 언어를 가졌다는 것을 말이죠.”
‘오페라’에 대한 각자의 애정을 확인한 것은 미국 소프라노 제시 노먼 덕분이다. 요바노비치는 “그는 인종차별과 정치적 괴롭힘을 받았던 사람”이라며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파워풀한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라고 했다. 두 사람에게 제시 노먼은 오페라에 대한 모든 영감의 시작이자 강렬한 레퍼런스”였다.
무대 위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때 두 사람이 가장 중요하게 염두하는 것은 ‘작품 자체’다. 이들은 그것을 “작품(이야기)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했다.
“고전을 어떻게 해석해 동시대 관객에게 전하고, 어떻게 현대에 적용해 동시대적으로 해석할지를 고민해요. 그런 다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죠. 오페라는 워낙 오랜 시간 공연돼왔기에 요즘엔 레지테아터(원작의 고전적 연출이 아닌 파격적 재해석으로 뒤바꾸는 것) 연출이 많아요. 하지만 전 그것이 오페라의 정수라 생각하지 않아요. 제 경우엔 원작의 에센스에서 출발해 나의 감정을 움직인 지점을 어떻게 전해줄지 고민해요.” (뱅상 위게)
국립오페라단 ‘피가로의 결혼’ [국립오페라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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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작품을 처음 보는 관객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원작을 풀어내는 것이 그가 항상 놓치지 않고 가져가는 부분이다.
요바노비치도 마찬가지다. 그는 “실내 디자인이나 건축이 그 공간에 속하는 사람들의 의도를 존중하듯, 무대에서도 이야기의 의도를 존중하려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현재와의 대화’로 동시대 관객과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이 그의 디자인으로 투영된다. 요바노비치는 “오페라 관객층은 중장년층 이상이고, 너무 클래식하면 젊은 세대는 지루하다 느낄 수 있어 항상 신선함을 줄 수 있는 것을 염두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예술관은 ‘피가로의 결혼’이 그려갈 세계로 투영된다. 원작 안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삶의 순간과 보석 같은 감정을 무대라는 세계를 통해 전달한다. 이들이 바라보는 ‘피가로의 결혼’은 결국 “인생에 대한 이야기”다. 이 안엔 권력, 계급, 사랑, 욕망 등 복잡다단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오페라는)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행복해지자고 말한다”고 했다
“관객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예기치 못하는 순간을 선물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행복한 감정이든 멜랑콜리한 감정이든, 그것이 눈물이든 환희든 안도든, 내 인생과 어떻게든 맞닿아 있다는 ‘진실한 순간’을 전달하려고 해요. 그 모든 감정을 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이 무대를 통해 한국 관객들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발견했으면 좋겠어요.” (뱅상 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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