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기자수첩] 뭘 발의했는지 기억도 못하는 野 원내대표실

0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조선비즈



2024년 12월 10일,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야당 수정안으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세제 혜택 확대와 배당소득 분리과세 등 정부가 추진하려던 세제 혜택이 빠진 채였다.

정부로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조세소위원회에서 수차례 회의를 거쳐 여야 간 합의된 다른 것까지 모두 없던 일이 됐기 때문이다. 야당은 그런 수정안을 당일 제안했고 바로 통과시켰다. 기자는 당시 그것에 대한 기사를 썼다.(관련 기사☞부자감세라는 野 반발에… ‘배당소득 분리과세·ISA·통합고용’ 稅혜택 백지화)

그로부터 석달이 지난 며칠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인 박찬대 의원실에서 연락이 왔다. 해당 기사에 (통과된 수정안이) ‘박찬대 의원이 발의했다’고 쓰여 있는데, “해당 법안은 실제로 발의된 내용도 아니고, 우리가 발의한 적도 없다. 우리는 이 내용을 모르니 허위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의원실에서는 “해당 기사의 문구로 인해 가짜 뉴스가 형성되고 있으니,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지 않으면 당 차원에서의 대응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협박으로 들렸다.

기사를 잘못 썼는지 다시 확인해 보니 틀린 것은 없었다. 본회의에서 통과된 것은 정부안(의안번호 2203522)의 ‘수정안’이었고, 발의자에는 박찬대 의원 이름이 적혀있었다.

얼마 후 해당 의원실은 “오해였다”며 “‘허위’ 등을 들먹인 것은 과했다”고 사과했다. 그리고는 수정안에 민주당 대표 격으로 원내대표 명의가 들어간 것이지, 박찬대 의원이 직접 새로 의원입법을 한 것은 아니란 취지라고 해명했다.

지난해 12월 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수정안 일부. /의안정보시스템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의원실은 왜 이렇게 ‘발의자’에 집착했을까. 알고 보니 디시인사이드·MLB파크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최근 ISA 세제 혜택이 줄어든 것이 박찬대 의원 때문’이라는 글이 급속하게 퍼진 것이 원인인 것 같았다. 외국납부세액 공제 적용 방식 변화에 따른 ISA ‘이중과세’ 논란과 그때의 세제 혜택 백지화가 함께 거론되는 모양이었다.

의원실에서는 돌아다닌 글에 적힌 내용의 논리적 오해를 바로잡고, 정책의 필요성이나 배경을 설명하는 건 중요치 않았던 것 같다. 석 달 전 기사의 한 부분인 ‘박찬대 의원이 발의했다’는 대목만 눈에 들어왔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애먼 기사만 탓했다. 민주당이 통과시킨 법안인데 법안 통과가 정당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그저 “우리 의원님이 한 것 아니다”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시의 반대가 과연 정책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물이었는지, 정치적인 ‘무조건 반대’는 아니었는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사실 정부가 요즘 ISA 법안을 다시 추진하는 가운데 야당에서도 논의가 부활할 조짐이기도 하다. 임광현 민주당 의원은 정부·여당안에 ‘청년형’·‘신혼부부형’ 혜택을 추가한 조특법 개정안 발의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민주당이 반대한 법안을 민주당이 다시 추진하려는 셈이다.

최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배우자 상속세 폐지’를 수용하겠다고 밝히며 상속세 개편에 물꼬를 튼 것이나, 양당 합의로 연금 개혁이 18년 만에 단행되는 것 등을 보며 모처럼 국회가 일을 하나보다 하는 작은 기대를 하던 차에 이런 행태는 씁쓸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한가롭게 ‘발의자가 누군지’ 문제 삼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인터넷 커뮤니티 글의 근원지를 색출할 시간이 있다면, 무엇이 나은 정책인지 고민하는 데 더 힘쓰기를 바란다.

세종=박소정 기자(soj@chosunbiz.com)

<저작권자 ⓒ ChosunBiz.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