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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0 (일)

[이봉호의 세계명반산책] 지옥의 묵시록과 핑크 플로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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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The Final Cut' 표지.


지난 18일 AP통신에 따르면 미국과 러시아 정상은 전화 회담을 통해 에너지와 인프라 시설에 대한 공격을 30일간 중단하기로 협의했다. 무려 3년이 넘도록 이어진 러시아발 침략전쟁이 종국에 다가서고 있다. 개전 직후 세계는 우크라이나의 항복을 예측했지만 우크라이나는 결사항전을 외치며 어렵사리 전황을 버텨왔다.

전쟁은 단지 해당 국가의 명칭만이 달라질 뿐 앞으로도 수없이 발발할 전망이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윌러드 대령은 미국 사령부에서 지령을 받는다. 캄보디아 밀림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든 커츠 대령을 암살하라는 내용이었다. 윌러드 대령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해군경비정에 탑승한다. 이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줄거리다.

이 작품은 콩고 전쟁을 소재로 삼았던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에서 영감을 얻어 3년 만에 제작을 완료했다. '지옥의 묵시록'은 제작 과정에서 수많은 어려움에 처해야만 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제작비의 부담과 함께 배우와 촬영진은 현지의 열악한 상황에 시달렸다. 영화 속에서 커츠 대령은 "공포에는 얼굴이 있다"는 명대사를 남겼다. 결국 윌러드 대령은 커츠 대령을 살해하라는 임무를 마치고 자신의 부대로 향한다. 전쟁의 공포와 허무를 심도 있게 다룬 '지옥의 묵시록'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미국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전미비평가협회상 등을 휩쓸었다.

반전영화로 '지옥의 묵시록'이 있다면 반전음악에는 프로그레시브 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The Final Cut(더 파이널 컷)'이 존재한다. 이 앨범은 1982년 발발했던 아르헨티나와 영국 간 포틀랜드 전쟁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당시 핑크 플로이드의 리더나 다름없었던 로저 워터스는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던 과거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포틀랜드 전쟁은 워터스의 삶과 깊은 개연성이 있는 사건이었다.

'The Final Cut'을 제작할 당시 핑크 플로이드는 또 다른 형태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룹 내에서 워터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길모어를 비롯한 멤버 간 갈등이 점점 증폭되는 상황이었다. 오랜 갈등 끝에 'The Final Cut'은 워터스가 원하는 콘셉트의 앨범으로 만들어졌다. 나머지 멤버들이 워터스의 주장을 대부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1983년에 등장했던 'The Final Cut'은 이전 작품인 'The Dark Side Of The Moon(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 'Wish You Were Here(위시 유 워 히어)' 'The Wall(더 월)' 등에 비해 무게감이 작지 않은 앨범에 속한다. 하지만 이 음반이 워터스가 참여했던 마지막 앨범임을 감안한다면 핑크 플로이드에 대한 애정을 가진 팬들에게 의미 있는 작품에 속할 것이다. 필자는 중학생 시절 동네 레코드점 유리창에 세워진 'The Final Cut' 수입 음반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앨범 후반부는 여타 핑크 플로이드 작품처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The Final Cut' 발표 이후 솔로 활동을 시작한 워터스는 핑크 플로이드 시절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워터스를 잃은 핑크 플로이드 역시 과거의 빛나는 음악성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작가 토마스 만은 "전쟁이란 평화로부터의 비겁한 도망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모든 전쟁은 무간지옥의 또 다른 재현이다. 하루빨리 비극적이고 약탈적인 전쟁이 막을 내리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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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호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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