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시거 구상' 7개월만 유연 정책 구사
北, 비난 성명 뒤 돌연 '군축 협상' 언급
접촉 성과 있었지만...KAL기 폭파로 파기
외교부는 매년 '30년 경과 비밀해제 외교문서'를 공개한다. <더팩트>는 1987년 9월 노태우 정부가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북한 외교관과의 접촉 완화 방침을 허가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실제로 북한 외교관과 접촉이 이어졌지만 해당 방침은 약 2개월 뒤 발생한 KAL기 폭파 사건으로 철회됐다. /임영무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87년 9월 11일, 외무부는 '북한 외교관과의 접촉 완화 방침'에 대한 논의에 착수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시거 구상' 시행 이후 약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앞서 개스틴 시거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88(서울)올림픽에 초조한 북한의 무력 도발 가능성을 줄이고,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유도해 한반도 긴장 완화에 기여할 수 있다"며 북한 인사와의 접촉을 금지한 미 외교 지침을 완화한 바 있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시거 구상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북한이 남북 대화를 중단한 상황에서 시기상조라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미국 측의 지속적인 요청에 따라 결국 이를 수용하기로 한 것이다. '북한 외교관과의 접촉 완화 방침'도 그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소련 간 화해 무드, 공산권 국가의 교류 확대 등 한반도 주변 정세도 영향을 미쳤다.
최광수 외무장관은 9월 17일 미국 방문에 앞서 국내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공식화했다. 최 장관은 "현재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 68개국에 달하고 있고, 오늘날 국제정치에서는 모든 국가가 이념과 체제를 초월해 실리를 추구하는 게 현실"이라며 "같은 언어와 역사, 문화를 가진 동일 민족의 외교관으로서 남북한 외교관이 서로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지내는 건 지극히 부자연스럽다"고 말했다.
당시 지침의 세부 내용. 정부는 최광수 외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공식화했지만 북한은 비난 성명을 내놨다. 이어 돌연 '다국적 군축 협상 제안'을 언급했다. /외교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최 장관은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한다는 이념에서 남북한 외교관이 서로 만나 자유롭게 대화함으로써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유엔(UN)에서 북한 대사를 만나 '남북 외무장관 회담' 문제를 비롯해 '남북 대화 재개' 등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북한은 1987년 7월 23일 남북, 미국이 참가하고 중립국 감독 위원회 대표들이 옵서버 역할을 수행하는 '다국적 군축 협상'을 1988년 3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골자는 △1991년까지 남북 쌍방 무력을 3단계에 걸쳐 축소하고 △1992년부터는 각각 10만 이하의 병력을 유지하며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와 △휴전선에 중립국 감시국을 주둔시키자는 것이었다.
언론에서는 북한의 이같은 제안에 대해 "민주화의 정치적 전환기의 불안을 대남 전략의 카드로 이용, 우리의 개헌 정국에 편승해 국론을 분열하려는 것"이라며 "한반도와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하려는 한편 이를 쟁점화해 88서울올림픽 공동 주최 명분을 확보하려는 책략"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북한은 88올림픽 남한 개최를 저지하고 남북 공동 개최를 시도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정부는 1987년 11월 29일 발생한 KAL기 폭파 사건으로 약 2개월 만에 북한 외교관 접촉 완화 방침을 철회했다. /외교부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다만 북한의 부정적인 입장과 달리 남북 외교관 접촉에는 큰 제한이 없었다. 접촉이 이뤄진 곳은 파키스탄, 노르웨이, 리비아,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 태국, 튀니지 등이었다. 태국에서는 북한의 통상대표부 대표와 국제의원연맹(IPU) 대표가 한국 측의 인사에 자연스럽게 응했다. 이후 대화에서 북한의 체육시설 공사 문제, 태국과 북한 간 교역 관계, 남북 신뢰 강구의 필요성 등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파키스탄 카라치에서도 남북 외교관이 북한 교역 관계와 남북통일 문제부터 김정일 승계 문제, 남한 대통령 선거 등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어 외무부는 1987년 11월 '88서울올림픽 이후 남북 관계 전망' 보고서를 작성했다. 올림픽 이후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과 평화 무드에 따라 북한이 대화에 유연한 태도를 보일 것이란 내용이었다. 외무부는 인도적, 문화적, 정치적, 군사적 남북 협력 및 교류를 추진하고 통일을 위한 단계적 추진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외무부가 해당 보고서를 작성한 그달 29일, KAL기 폭파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 관계는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최광수 외무장관은 모든 재외공관장에게 긴급 전문을 보내고 "칼기 폭파 만행에 대한 대북괴 제재 조치의 일환으로 '북한 외교관과의 접촉 완화 방침'의 시행을 1988년 1월 16일부로 철회한다"고 통보했다.
js8814@tf.co.kr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이메일: jebo@tf.co.kr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