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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토)

[우보세]'막말 대장' 두테르테의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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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마닐라(필리핀)=AP/뉴시스]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 202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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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은 '막말' 대장이다. 다바오 시장 시절, 폭도들에게 성폭행 당한 후 살해당한 호주의 여성 선교사에게 "아름다웠다. 시장인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 인권 유린을 걱정하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지옥으로 떨어지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필리핀을 방문해 길이 막히자 "집으로 꺼져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언급하며 "300만명 마약중독자를 죽이면 기쁠 것"이라고 했다.

막말은 그의 대선 승리에 기여했다. 기득권 정치인과 달리 두테르테는 저잣거리의 언어를 이해한다며 서민적 이미지를 강화했고, 일상에서 치안의 부재와 범죄의 위협에 시달려 온 필리핀 국민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부여했다. 그가 마약사범을 즉결 처분하는 등 문명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철혈 통치'를 지속하고도 임기 말까지 85~90% 지지율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이다.

막말은 오래 전부터 두테르테와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에게 강력한 무기였다. 한동안 이탈리아 정치를 지배했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를 향해 "선탠을 제대로 했다"고,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전 대통령은 코로나19 희생자에게 "미안하지만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그게 인생"이라고 조롱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다는 표피에 싸여 있지만 포퓰리즘의 본질은 '적'을 설정하고, 다수의 이익을 위해선 극단적 처방도 행한다는 정치 노선이다. 구조화된 불평등이 포퓰리즘에 먹이를 제공하면서 주된 적은 엘리트와 부자로 규정되고, 때로는 여성과 성소수자, 이민자 등을 향한다. 이때 '우리 대 그들'의 구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포퓰리스트의 막말이 등장한다. 분열의 단어는 아군이 '정의의 편'에 서 있음을 확신하게 만들고, 이를 관철하기 위한 분노와 공격마저 '의로움'으로 포장한다.

전통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런 막말 포퓰리스트의 득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이들의 실패는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의 핵심이다. 대표적으로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전형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0년 대선에서 패배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지만, 4년 뒤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면 과연 포퓰리즘의 끝은 어떠할까. 두테르테의 오늘이 답이 될 수 있겠다. 지난 11일 마닐라 공항에서 인터폴에 붙잡힌 그는 "내가 무슨 범죄를 저질렀냐"며 화를 냈지만, 반인도적 살상 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수감됐다. 마약과의 전쟁 와중에 사법절차 없이 처형된 용의자가 정부 집계로만 6000여명, ICC는 최대 3만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2024년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갈등도는 4점 만점에 3.04점으로 2018년 첫 조사 이래 가장 높은 수치였다고 한다. 둘로 갈라진 광장의 국민들은 물론 차기 대권을 꿈꾼다는 여러 정치인들도 과거에는 감히 내뱉지 못했던 막말을 뱉어내고 있다. 한국이 필리핀의 실패 사례를 답습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변휘 기자 hynews@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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