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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1 (월)

'실리콘 트라이앵글' 속 대만과 한국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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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방패' 대만의 이중 고민
미중 경쟁 속 진퇴양난의 처지
한국, 대만과 협력 모색도 필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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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하반기, 미국 대선을 두고 많은 포럼이 열렸다. 필자가 참여한 포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실리콘 트라이앵글 같은 기정학(技政學) 개념이 의제가 된 대만의 포럼이었다. 이 개념은 미국‧중국‧대만의 삼각구도 속에서 반도체가 지정학에 미치는 영향을 의미한다. 반도체와 AI가 주도하는 현 세상에서, 미중은 대만이라는 기정학적 요충지를 두고 안보와 기술 패권이 결합된 복합 경쟁을 벌이고 있다.

냉전 시절부터 미소는 첨단 기술을 두고 견제를 벌였다. 당시에도 반도체는 핵무기·위성 등에 준하는 전략 물자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AI까지 맞물리며 반도체 파급력은 더 강해졌다. 대만이 독점하다시피 하는 칩 생산이 한 달만 멈춰도, GPU 가격은 급등할 것이고 스마트폰·자동차 등 산업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이는 실리콘 트라이앵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대만이 가진 지정학적 '불침항모'로서의 가치에 '반도체 허브'라는 기술적 가치까지 더해지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중국' 원칙 때문에 공식 외교‧군사 동맹을 맺지 못하지만, 서태평양 전략에서 대만을 방기하기에는 중국의 팽창이 두렵다. 그래서 오랫동안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AI와 반도체 분야에서 대만 의존도가 커지면서, 이 모호성은 점차 '전략적 확실성'이 될 수 있다. AI를 국가혁신 의제로 삼은 미국이 가장 핵심인 칩 생산을 대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면, 대만을 보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략적 확실성은 미국에게 부담이 된다. 보호 강도를 높이면 중국이 더 강하게 반발해 대만해협 긴장이 커진다. "대만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신호를 조금만 흘려도, 중국은 대만 통일 의지를 실행에 옮길 수 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대만 반도체 의존도 분산 정책에 집중하려 한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에는 칩스법을 통해 인텔 등 미국 기업을 지원하고, TSMC를 아리조나로 불러들여 첨단 파운드리 팹 건설이 본격화됐다. 또 일본에는 래피더스 같은 파운드리 분산 전략도 추진되고 있다.

그렇지만 대만 의존도를 줄인다고 해도, TSMC가 쌓아온 초격차 역량과 현장 문화까지 대체하기는 어렵다. 대만 엔지니어들의 혹독한 교대-집중근무, 그리고 파운드리 생태계의 강한 결속력까지 대만 밖에서 재현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TSMC 입장에서도 핵심 경쟁력을 모두 분산시키는 것은 전략적 자충수가 되므로, 해외 투자 비중을 너무 높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더 강력한 요구를 하고 있다. TSMC에게 인텔과 합작 혹은 아예 인수하라는 투자 확대 압박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대만도 이런 압박을 수용하기는 어렵다. '실리콘 방패'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반도체는 곧 대만에게 안보 자산이다. 동시에 중국 영향력이 팽창하는 상황에서, 대만이 스스로 방어할 역량을 갖추기도 어렵다. 대만은 유사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을 이끌어 내야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고립주의와 보호무역 기조로 대만 문제 불관여라는 방향으로 전략적 확실성을 취할 수 있다. 대만 입장에서는 안보와 기술이 '이중 굴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실리콘 트라이앵글 구도의 변동은 한국에도 영향을 준다. "대만 위기는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제로섬식 사고는 단견이다. 전 세계가 반도체 공급 불안을 겪으면, 한국 산업도 피해를 보고 업계 판도는 훨씬 복잡해질 수 있다. 미국은 자국 기업 위주로 빈틈을 채우는 정책을 취할 것이고, 중국은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한국도 잠재적 리스크를 피하며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 메모리 분야만이 아니라 첨단 패키징과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한국 내 가치사슬을 더 단단히 만들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대만과의 협력도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다. 서로 "안보 수요"가 걸린 기술 패권 시대이기에, 때로는 경쟁만큼이나 협력도 중요한 카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일보

권석준 성균관대 화학공학부 교수·성균관대 공과대학 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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