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89세 남성 보의 시선으로 노년의 심리와 생활을 섬세하게 묘사한 소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북파머스)이다. 스웨덴 작가 리사 리드센(37)의 데뷔작이다. 지난해 12월 국내에 출간된 후 3개월 만에 2만 권이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을 쓴 리사 리드센 작가. ⓒGabriel Liljev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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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지만, 문학 독자층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스웨덴 작가의 데뷔작이 이처럼 호응을 얻은 것은 이례적이다. 스웨덴은 소설 ‘오베라는 남자’(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요나스 요나손 지음), ‘밀레니엄 시리즈’(스티그 라르손,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등이 인기를 얻었지만 국내 독자에게 그리 친숙한 나라는 아니다. 독자들은 “인생 끝자락에서 엉킨 감정을 풀어가는 내용이 삶을 뒤돌아보게 한다”,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쯤 경험하게 되는 내 의사와 상관없는 일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 소설”, “가슴이 먹먹해져 눈물이 핑 돈다”는 리뷰를 남겼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 책표지. 북파머스 제공 |
이 책의 편집자인 조혜영 책읽어주는남자 북파머스 브랜드의 팀장을 21일 경기 고양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조 팀장은 지난해 초 에이전시가 보낸 뉴스 레터를 통해 책에 대해 알게 됐다.
에이전시에 요청해 검토용으로 작성된 전체 영문 원고를 곧바로 받았다.
조 팀장은 바로 계약하자고 에이전시에 연락했다. 그가 뉴스레터를 받은 지 이틀만이었다.
“원고 검토 기간은 보통 2주 정도 되는데요, 마음이 급했어요. 전승환 대표님도 ‘그렇게 확신이 선다면 빨리 진행하라’고 하셨고요.”
여러 출판사가 관심을 보여 판권을 두고 두 차례에 걸쳐 경쟁했다.
소설의 분위기에 맞춰 가을이나 겨울에 책을 내고 싶은 마음에 서둘렀고, 지난해 12월 출간할 수 있었다. 해외 첫 출간 기록을 세운 것. 지난해 9월 스웨덴 예테보리도서전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2024 스웨덴 올해의 도서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영문판은 올해 8월경 출간될 예정인데 미국서점협회 선정 도서에 올랐다.)
“북유럽의 큰 문화축제인 예테보리 도서전은 유럽에서도 주목받는 도서전이에요. 이 책은 스웨덴은 물론 핀란드 덴마크 노르웨이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앤서니(앤서니 홉킨스)의 시선으로 일상을 그린 영화 ‘더 파더’. 방문을 열고 나가면 병원 복도가 나타나고 잠깐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몇 주가 지났다고 하는 등 공간, 날짜가 휙휙 바뀐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에서 보 역시 잠시 뭔가를 했다고 여기지만 몇 시간이 지난 것을 알게 된다. 판씨네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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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파더’에서 앤서니(앤서니 홉킨스·오른쪽)와 딸 앤(올리비아 콜맨). 앤서니는 낯선 여성이 앤이라 주장하고 처음 보는 남자가 앤의 남편이라고 하는 등 딸의 모습과 상황이 자꾸 바뀌자 두려움에 휩싸인다. 판씨네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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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수 번역가가 스웨덴어로 바로 번역할 수 있었던 것도 출간 속도를 높였다. 손 번역가는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욘 포세의 소설(‘샤이닝’, ‘멜랑콜리아1-2’)도 번역했다.
일부 독자 사이에서는 번역이 다소 어색하다는 의견도 있다. 보가 아내를 주로 ‘당신’, 아버지는 ‘노인’으로 칭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대명사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보는 아내 프레드리카를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계속 ‘당신’이라고 불러요. 폭력적이었고 많은 상처를 준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커서 ‘아버지’라 부르고 싶어 하지 않고요. 호칭에는 보의 감정이 반영돼 손 번역가님과 상의한 끝에 원문 그대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영화 ‘더 파더’ 에서 앤서니(앤서니 홉킨스)는 사람, 장소, 시간이 수시로 바뀌는 것처럼 느끼자 혼란스러워한다. 판씨네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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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두루미가 남쪽으로 가는 날’은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로 옮겼다. 두루미는 먹이를 최대한 먹어 살을 찌우며 가을이 오기 전에 떠날 준비를 한다. 보는 눈을 감을 무렵 남쪽으로 날아가기 위해 두루미들이 모여드는 소리를 듣는다. 표지는 나무가 우거지고 들판에 꽃이 가득 핀 가운데 나이든 남성과 반려견이 집 앞에서 함께 한 그림을 담았다.
요양보호사가 기록한 일지가 사이사이 배치돼 보의 상황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게 한다. 5월부터 보가 눈을 감는 10월까지, 6개월간을 그렸지만 보의 회상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보의 부모, 보, 아들 한스, 한스의 딸 엘리노르까지 4대에 걸친 이야기가 펼쳐진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을 쓴 리사 리드센 작가. ⓒGabriel Liljev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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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실제 경험이 많이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소설이지만 심리와 상황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현실적이죠. 할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가족에게 쓴 메모에서 영감을 얻어 소설을 썼습니다. 저자는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집에 자주 가서 목욕도 시켜드리며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해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가 정말 재밌었고 인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저자는 작가 아카데미에 다니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조 팀장은 책을 통해 우리가 노인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보는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했지만 언제부터인가 곰팡이 맛이 난다며 입에도 대지 않는데 아들은 이를 모르고 종종 사와요. 우리도 부모님을 대할 때 그러는 것 같아요. 노인도 감정이 있고 계속 하고 싶은 뭔가가 있는 존재인데 이를 간과하죠.”
독자 중에서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매우 외로웠겠다. 그럼에도 행복한 삶이었기를 바란다”는 리뷰도 있다.
책은 ‘가족, 화해’를 앞세워, 가족을 주제로 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찾아 홍보했다.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읽은 소감을 담은 콘텐츠도 소셜 미디어로 알렸다.
“노년, 죽음보다는 가족, 사랑, 화해를 담은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보는 눈 감기 전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마침내 해냅니다. 저자가 시상식에서 ‘내 책이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져 기쁘다’고 말한 것도 고려했습니다. 저자는 노인을 보호받거나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최후까지 존엄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담았어요. ‘어머니, 할머니의 상황이 이해된다’는 반응도 적지 않은 등 많은 독자들이 공감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조 팀장은 소설은 물론 에세이 인문서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만든다.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을 많이 내고 싶어요. ‘이 책은 꼭 읽으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책을 만들겠습니다.”
■‘새들이 남쪽으로 가는 날’(2024년·북파머스)은…. |
89세 남성 보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6개월간을 보의 시선에서 세밀화처럼 그린 소설이다. 치매를 앓는 아내는 3년 전 요양원으로 갔고, 보는 반려견 식스텐을 키우며 혼자 지낸다. 아들 한스는 보가 식스텐을 돌보기 어렵다며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한다. 보는 크게 분노한다. 잠잘 때도 함께 하는 식스텐은 항상 곁에 있는 유일한 존재다. 요양보호사들은 기저귀를 차라고 당부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들다. 차라리 바지와 속옷을 적시고 갈아입는 게 낫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 아래가 젖으면 당혹스럽기만 하다. 부엌 소파에서 자는 게 편하지만 아들은 푹신한 침대를 놔두고 딱딱한 소파를 고집하는 보를 이해하지 못한다. 보는 한스가 어릴 적 낚시를 함께 다니고, 친구 투레의 오두막에서 셋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어느 순간부터 멀어졌다. 대학에 진학한 한스가 정치, 사회 문제에 대해 어려운 용어를 사용하는 모습에 이질감을 느낀다. 보는 어릴 때부터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다. 자신은 아버지와 다르다고 여겼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아들과 서먹해진 건 마찬가지다. 나이가 드니 입맛도 변해 단맛 외에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피곤해지고 잠이 쏟아진다. 식스텐을 산책시키고 아내에게 쓴 편지를 직접 부치는 등 스스로 하고 싶은 게 많다. 하지만 아들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 노인의 신체 상태와 심리를 체험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앤서니(앤서니 홉킨스)의 시선으로 일상을 그린 영화 ‘더 파더’(2021년)가 떠오른다. 소년이 자라 제재소에서 일하며 가정을 꾸리고, 손녀를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할아버지가 된 지금까지, 보가 통과해 온 시간이 펼쳐진다. 보는 아들과의 엉킨 매듭을 풀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쓰고, 마침내 이를 해낸다. 두루미들이 먹이를 최대한 먹으며 남쪽으로 떠날 준비를 하듯, 생의 끝을 향해 담담히 나아가며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꺼내 보이는 보의 모습이 긴 여운을 남긴다. |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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