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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 (화)

"어르신 눈 마주쳤는데 못 구했어요"… 시속 8km 산불 덮친 영덕 실버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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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넘어온 날 영덕군, 사망자만 9명
사고 당사자에게 그날 상황 들어보니
"속도·방향 종잡을 수 없어 대피 못해"

26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 도로에 불에 탄 승용차가 세워져 있다. 전날 밤 인근에 있는 실버타운 직원과 입소자 등 6명이 차를 타고 대피하던 중 화염으로 차가 폭발해 3명이 숨졌다. 영덕=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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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30분 만에, 도대체 뭐가 뭔지도 모르게 말이에요. 30분 만에 전부 그렇게···."

27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의 한 실버타운에서 기자와 만난 원장 A씨는 '30분'이란 단어를 수차례 반복했다. 이곳에선 이틀 전 입소자 3명이 화마를 피하다가 숨졌다. 대피 차량 바퀴에 불이 옮겨붙어 차가 폭발해버리면서다. A씨는 "30분 만에 황장재(약 20km 떨어진 영덕군 지품면의 고개)에서 여기까지 초토화가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고 망연자실해했다.

의성에서 시작된 불길이 경북 북부로 번지기 시작한 25일 저녁 8시 30분쯤. A씨는 화재 소식을 듣고 보호사들을 불러 모았다. 음식, 기저귀, 위생용품과 쓰레기봉투 등 필요한 물건들을 미리 챙겨 대피소인 영덕국민체육센터로 떠나기 위해서다. 입소자 21명분을 나르려면 직원 차량에 짐을 가득 실어도 여러 번 오가야 했다. A씨도 차량 트렁크와 뒷좌석에 이불을 꽉꽉 눌러 담고 대피소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연기를 실은 바람이 불어왔고 불씨가 번졌다.

"도로를 달리는데 불기둥 같은 게 날아와요. 눈앞 산 정상에 떨어지는데, 번지는 속도가 제 차 속도보다도 빠르게 느껴졌어요. 여기 '껑충', 저기 '껑충' 계속 떨어지는 거예요."

실제로 이번 산불은 역대 가장 빠른 속도, 사람이 뛰는 속도와 맞먹는 시속 8km로 번지며 서울의 절반 넘는 면적을 태웠다.

60대 보호사가 80대 노인 대피시키려다...

27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 한 건물 외벽에 대피하던 차가 화염으로 폭발해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다. 영덕=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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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 확산 속도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A씨는 직원들에게 다시 지시를 내렸다. "짐이든 뭐든 가져올 생각하지 말고 일단 어르신들 전부 모시고 바로 떠나세요."

긴박한 대피 행렬이 이어졌다. 사고는 오후 9시쯤 마지막 출발 차량에서 발생했다. 금세 포악해진 산불은 기어이 차를 덮쳤다. 60대 여성 요양보호사 두 명이 거동이 불편한 입소자 4명을 한 명씩 차례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 명을 가까스로 도로 바깥에 옮기고 나니 불은 이미 바퀴까지 번져있었다. 두 번째 입소자를 끌어내던 중 차량은 폭발해 전소됐다. 차량에 남아있던 80대 입소자 3명은 모두 숨졌다. 실버타운에서 불과 500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산불로 그날 밤 통신망은 먹통이었다. 이튿날 아침에서야 A씨는 사고가 난 마지막 조 보호사와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얼굴이 퉁퉁 붓고 머리카락은 불에 그을린 채로 자책만 쏟아냈다. "원장님, 제가요. 어르신을 놓쳤어요. 눈이 마주쳤는데 구하지 못했어요. 그 모습이 계속 떠올라요. 정말정말 잘못했어요."

산불이 허망하게 앗아간 이들의 면면이 A씨에겐 지금도 눈에 선하다.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노인들의 사진을 보며 그는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할머니(부인)밖에 모르던 '할머니 바보'였어요. 다른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고 시계를 좋아하는 점잖은 신사였지요. 또 이 할머님은 어찌나 개구쟁이였는지, 정말 밝은 분이었는데···." 이어 그는 "예쁜 사진들을 모은 앨범을 만들어 (유가족들에게) 주려고 한다"면서 울먹였다.

같은 마을에서 노부부도 참변

27일 경북 영덕군 영덕읍 매정리 주택이 산불에 타 파손돼 있다. 영덕=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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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불은 속도는 물론 경로 역시 예상하기 어려웠다. 화물차 운전기사 이모(62)씨는 25일 오후 6시 20분쯤 영덕군의 긴급 재난문자를 받고 곧장 집을 나섰다. 피난 행렬로 도로가 마비될 거라고 생각해 주차 등 안내를 돕기 위해 대피소인 영덕국민체육센터로 향한 것이다. 모범운전자회 회원인 그는 평소에도 교통관리 봉사활동을 해 왔다고 한다. 의용소방대 소속인 그의 아내도 함께했다.

약 1시간 뒤. 군청에서 다시 문자가 날아들었다. 산불이 발생했다고 알린 곳은 영덕군 영해면 대리. 첫 문자에서 언급된 지역(영덕군 지품면)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곳이다. 이씨는 "북동쪽으로 (산불의 방향이) 바뀌었으니까 안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속속 도착하는 대피객의 전언으로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부모가 사는 영덕읍 매정리도 위험할 것 같았다. 이씨는 부리나케 차로 돌아갔지만 불씨는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었다. 부모 집이 있는 곳은 불길로 둘러싸여 아예 접근이 불가능했다. "동생이 집 앞까지 갔는데 도저히 차가 가질 못하는 거예요. 불씨가 너무 많이 나고, 그 열기에···. 그까지(거기까지) 가는 것만 해도 차 안이 실내가 이미 뜨거운 상태였으니까네."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찾은 집은 이미 잿더미가 돼 있었다. 혹시 이미 대피한 건 아닐까, 주변 대피소 다섯 군데를 돌았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다. 새벽 4시가 넘어 다시 들른 이씨는 집에서 50m가량 떨어진 밭에서 숨져 있는 부모를 발견했다. "그 쪽에 풀이 없고 탈 게 없으니까네. 글로(거기로) 피신한다고 내려간 모양이겠죠. 그 바로 우측에, 거기서···." 이씨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공만 바라봤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28명이다. 이 중 영덕군에서만 9명이 숨졌다. 정부는 경북 안동시, 청송군, 영양군, 영덕군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추가 지정했다.


영덕= 최현빈 기자 gonnal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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