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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중대’할 수는 없다 [이진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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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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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대통령 탄핵 선고일이 4월4일로 정해졌다. 폭풍전야 같은 긴장감과 불안감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자다가도 벌떡 깬다. 잠결에 머리맡 핸드폰을 더듬어 속보가 없나 살피는 게 습관이 되었다. 침침한 눈으로 화면을 들여다보면 그 새벽에 잠 못 들고 뭔가를 쓰거나 읽고 있는 지인들이 보인다. ‘내란성 불안장애’가 법정전염병처럼 전 국민을 앓게 한다.



지난주부터 떠돌기 시작한 이른바 ‘헌재 5 대 3 시나리오’가 더 불안을 키웠다. 헌법재판관 의견이 갈려서 5 대 3으로 윤석열 탄핵이 기각될지 모른다는 소문은, 한덕수 총리에 대한 탄핵 기각 선고의 후폭풍이다. 5 대 2 대 1의 심판 의견 중에서 각하 의견을 낸 정형식·조한창 재판관, 그리고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것이 위법이 아니라고 주장한 김복형 재판관 세 사람이 윤석열 탄핵심판에서 기각이나 각하 의견을 낼지 모른다는 추정이다. 만에 하나, 그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엘바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처럼 개선장군 같은 미소를 띠고 윤석열은 미리 준비한 대국민 담화를 읽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국민의 승리’라고. 그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선언할 것이다. “유례없는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국가 전복 세력에 맞서 결연히 싸우겠다!”고. ‘광화문파’ 전광훈과 ‘여의도파’ 손현보·전한길이 대대적인 축하집회를 열면, 윤상현·나경원 같은 이들은 그 무대에 올라 감격에 겨운 만세를 외칠지도 모르겠다.



윤석열의 복귀에 항의하는 시민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진압 작전이 실행될 것이다. 구타와 강제연행,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면, 강경 진압에 미온적인 군과 경찰은 징계를 당할 것이다. 애초에 ‘수거 대상’이었던 인사들, 강제연행에 항의하는 시민들, 그걸 취재하는 기자들은 끌려가고 감금되고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래도 항거가 진압되지 않으면 다시 제2의 계엄이 선포될지 모른다. 군 헬기가 뜨고 총칼로 무장한 군인이 국회와 정당과 언론사에 투입되고,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도널드 트럼프의 관세 폭탄에 가뜩이나 얼어붙은 경제는 거덜이 날 것이다. 이게 피해망상이라면 좋으련만, 계엄 선포 석달 전까지도 계엄설은 ‘거짓 정보이고 정치공작’이라던 대통령실과 김용현의 뻔한 거짓말을 생각하면, 그 무엇을 상상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덕수 총리에 대한 탄핵이 기각된 사유는 ‘위법한 사유가 없다’는 게 아니었다.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은 건 헌법과 국가공무원법 위반이라는 의견이 8명 중 5명이었지만 “헌법재판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목적 또는 의사에 기인하였다고까지” 보기 어렵고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기각한다고 했다. 이른바 ‘중대성’의 원리다.



중대성의 문제는 노무현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결과를 가른 중요한 척도였다. 2004년 노무현 탄핵심판에서 헌재는, “‘탄핵심판청구가 이유 있는 때’란 모든 법 위반의 경우가 아니라, 단지 공직자의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중대한’ 법 위반의 경우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법 위반이 어느 정도로 헌법 질서에 부정적 영향이나 해악을 미치는지’와 ‘피청구인을 파면하는 경우 초래되는 효과’를 서로 형량하여” 파면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 기준은 박근혜 탄핵 선고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피청구인은 대국민 담화에서 진상 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하였으나 정작 검찰과 특별검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하였습니다. 이 사건 소추와 관련한 피청구인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헌재 2016헌나1, 박근혜 파면선고 결정문)



헌법재판소에 묻는다. 중대성에 있어 윤석열이 이보다 덜한가? 국회에 군을 투입하고 일체의 정치활동과 언론자유를 금지했으면서 ‘국민계몽’용이었다고 발뺌하는 대통령이 ‘헌법 질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 얼마나 중대한지 따지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이런 자가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게 아니면 무엇이 배반인가? 저항하는 국민을 국가 전복 세력으로 처단하려는 통치자를 제지하는 게 중대하다. 다시는 나라가 총칼로 짓밟히지 않게 하는 게 중대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수거하고 폐기하려는 내란범을 몰아내는 게 중대하다. 세상에 그보다 중한 게 대체 무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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