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습격하러 온 북 무장공비
체포 때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와”
목회자 변신 후 반공·인권 활동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던 1968년 ‘1·21 사태’ 당시 생포된 김신조씨(왼쪽)가 체포 직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씨는 1997년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서울성락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은퇴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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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던 1968년 ‘1·21 사태’ 당시 생포된 뒤 귀순한 김신조 목사가 9일 별세했다. 향년 83세.
김 목사가 원로목사로 있던 서울성락교회에 따르면, 김 목사는 최근 건강이 나빠져 자택에서 요양하던 중 이날 새벽 숨을 거뒀다.
고인은 일제강점기인 1942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북한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이 1967년 창설한 대남공작 특수부대인 ‘124부대’ 소속으로 1968년 1월 청와대 습격 및 박정희 대통령 등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았다. 그를 포함한 31명은 같은 달 18일 새벽 경기 연천군의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잘라 월남했다.
이들은 21일 밤 세검정길을 통해 청와대에 진입하려 했으나 검문 중이던 경찰에 발각됐다. 청와대까지 100m를 남겨둔 상태에서 최규식 당시 종로경찰서장, 정종수 순경 등과 대치한 북한 공작원들은 수류탄과 기관단총을 쏘며 저항했다. 이들을 막아섰던 최 서장과 정 순경도 순직했다.
기자회견장에 선 고인은 자신의 임무를 묻는 말에 “청와대 까러 왔수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시요”라고 답해 전국에 충격을 줬다. 북한 공작원들의 청와대 침투 사건인 1·21 사태는 그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으로, 그들의 침투로는 ‘김신조 루트’로 불렸다.
남한에서는 김신조 사건 이후 공군 소속 684특공대를 조직해 북한 침투 및 요인 암살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 준비 과정과 계획 폐기 상황을 다룬 게 영화 <실미도>로, 영화 초반부에 1·21 사태와 고인의 기자회견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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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귀순 후 군에 정보를 제공한 뒤 월남 2년 만인 1970년 풀려났고 그해 10월 결혼하며 남한에 정착했다. 자영업을 하다가 배우자의 권유로 1981년 서울성락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서울침례회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뒤 1997년 목사 안수를 받아 서울성락교회, 성락삼봉교회 등에서 목회했다. 최근까지도 서울성락교회의 매 주일 예배에 출석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2010년 한나라당 북한인권 및 탈북자·납북자위원회 고문을 지내는 등 ‘반공 강사’로도 활동했다. 각종 매체에서 1·21 사태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자전적 에세이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 신앙 간증집 <날지 않는 기러기>를 남겼다.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교원예움 서서울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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