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윤성의 대학시절 모습. 이인효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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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검 시 헌병대 수사관들로부터 특수한 사정이 있으니 유족들에게 유서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받았어요.”
“부검 시 헌병대로부터 이윤성에게 유서가 있었으나 유족에게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말인가요?”
“네. 아마 이 사건이 민간이었다면 당시 용기를 내서 유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급했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당시 저도 군인이었잖아요.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제가 깊이 관여할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학 시절 강제징집된 뒤 1983년 5월 보안부대(현 국군방첩부대) 영내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이윤성(1962년생)의 유서를 수사기관이 은폐했었다는 진술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나왔다.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 조사 과정에서 “나 같은 사람을 무엇 때문에 괴롭히느냐, 앞으로 나 같은 사람을 만들지 말라”라는 내용의 유서를 목격했다는 보안부대 사병의 진술은 있었으나 추가 진술이 확보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번 진실화해위 조사에서는 당시 부검의가 “유서를 유족에게 언급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고 이윤성(1962~1983). 이인효씨 제공 |
진실화해위는 15일 오후 열린 제105차 전체위원회에서 고 이윤성의 누나 이인효(66)씨가 신청한 ‘이윤성 군의문사 사건’에 대해 국가의 위법한 공권력 행사가 인정된다며 진실규명(피해 확인) 결정하고 국가의 사과와 피해·명예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이윤성이 경찰 수사 과정에서 불법 구금 및 폭행을 당했고, 강제징집과 보안사의 프락치 활동 강요 등 녹화공작의 대상이 됐다는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지난 1일과 8일 전체위에서 이 사건을 논의했으나 박선영 위원장 등의 반대로 두 차례 보류한 바 있다.
성균관대생 이윤성은 1982년 11월 학생의 날 연합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돼 강제징집됐고, 경기 연천군에 있는 육군 5사단 27연대 2대대 5중대 2소대에 배치돼 복무했다. 그는 이듬해 5월4일 의가사 전역을 여드레 앞두고 제205 보안부대 영내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5사단 헌병대는 사건 직후 이윤성이 ‘월북 혐의’로 보안부대에 연행됐고,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새벽 3~4시께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고 이윤성(왼쪽서 두번째)씨가 1981년 2월 경기고를 졸업할 때 가족들과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아버지 이명률, 어머니 박정선, 외할머니 함복녀씨. 이인효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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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이 사건을 조사한 의문사위는 강제징집 및 녹화공작이 이윤성의 죽음과 인과관계가 있으므로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녹화공작’의 구체적 실행 양상과 이윤성의 사망 직전 행적 등을 특정하지 못했고, 의문사위에 이어 사건을 조사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도 제205 보안부대 심사과정에서의 가혹행위 여부, 학원 프락치 활동 강요 여부에 대해서는 자료와 진술의 부재로 판단하지 못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조사에서 기존 국가기관의 조사기록을 검토하고, 보안사의 녹화공작 관련 자료를 추가로 입수해 녹화공작의 실체와 구체적 실행 내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참고인 조사를 통해 이윤성의 보안부대 연행 경위와 프락치 활용 시도, 이윤성과 비슷한 시기 녹화공작 실행 내용, 사망 경위 은폐조작 시도에 대한 진술을 추가로 확보했다.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 이윤성은 1983년 4월 이전 1차례 이상 녹화공작 심사를 받고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했으며, 의가사 전역을 12일 앞둔 1983년 4월30일 제205 보안부대에 소환되어 불법구금, 야간 조사 및 폭언·구타를 수반한 강압적인 조사를 받았다. 진실화해위는 이윤성의 유서가 존재했다는 부검의의 추가 증언 등을 종합할 때, 이윤성은 전역 직전까지 반복적인 녹화공작 심사와 프락치 활동 강요로 인한 극심한 심적 압박감을 느끼고 사망에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제205 보안부대에서는 이윤성뿐 아니라 연세대생 정성희(1982년 7월23일), 서울대생 한희철(1983년 12월11일)이 조사과정에서 사망했다.
고 이윤성의 대학 재학 중 모습. 이인효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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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는 보안부대 영내에서 녹화공작 심사 중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윤성의 사망 경위와 관련 공문을 허위로 작성하는 등 조작하고, ‘심사결과보고서’ 등 녹화공작 자료와 사망 현장인 심판대를 철거해 사건 은폐를 계속했으며, 사망 사고에 대한 관계자 처벌도 미온적으로 실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이윤성이 사망한 뒤에도 녹화공작을 중단하지 않고 지속해 심사대상자들에 대한 추가적인 인권침해가 일어났다. 보안사는 나아가 이윤성에게 ‘월북 혐의’라는 조작된 혐의를 부여해 군내 교육자료로 사용하는 등 망자의 명예를 훼손했고, 유가족의 진상규명 시도를 막기 위해 유가족을 지속해서 사찰하고 협박하는 등 인권을 침해했다.
이윤성의 누나 이인효씨는 이날 한겨레에 “윤성이는 타살당한 것과 마찬가지다. 진실화해위를 통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추가로 발견돼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윤성 사건의 진실규명으로 2기 진실화해위에서 의문사 신청 사건 24건 중 김용원·한희철·김두황·이재문 등 총 5건의 진실규명이 이뤄졌다.
고 이윤성이 고1때 다섯 명의 누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이 이인효씨다. 이인효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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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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