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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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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동에 종이꽃 100송이 피었다... 불교가 박종철 열사를 기리는 법 [요즘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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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설법 전승자 다여 스님 대규모 지화전
    박종철 열사 극락왕생 비는 '왕생화' 등
    "희생자 영혼 위로, 인간 존엄으로 승화"

    편집자주

    아는 만큼 보이는 종교의 세계. 한국일보 종교기자가 한 달에 한 번씩 생생한 종교 현장과 종교인을 찾아 종교의 오늘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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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용산구 민주화운동기념관(남영동 옛 대공분실)의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509호에 전시된 다여 스님의 '왕생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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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폭력의 현장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민주화운동기념관)에 종이꽃 100송이가 피었다. 삼척 안정사의 주지이자 민중의 언어로 불법을 전하는 '땅설법'의 생존 전승자로 알려진 다여(茶如) 스님이 만든 지화(紙花)다.

    1970~80년대 국가 폭력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넋을 기리는 전시 '재, 꽃잎, 풀림의 의례'가 6월 재개관한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다음 달 28일까지 열린다. 지난 23일 개막식 때 만난 다여 스님은 "불교 지화는 꽃마다 사상과 의미를 담고 있어 꽃으로 이야기하고 기도하고 소통할 수 있다"면서 "희생된 영혼을 위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알리고 더 큰 의미로 승화하는 지화를 드리려 했다"고 말했다.

    부처의 첫 가르침 "우리 모두는 존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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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설법과 전통 지화 공예의 계승자인 삼척 안정사 주지 다여 스님이 23일 서울 용산구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열린 '재, 꽃잎, 풀림의 의례'에서 땅설법을 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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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여 스님은 개막 당일 "다른 사람의 몸을 감금하고, 폭행하고, 생목숨을 잘라내는 것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생각이 옅었기 때문"이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공감하지 않는 이들이 정치 권력을 쥐고 누군가를 굴복시키려 하니 비극이 생겨난다"고 비판했다.

    그는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걸어간 후 말했다고 전해지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를 "우리 모두 존엄합니다"라고 풀어 설명했다. 대승불교 전통에서 이 구절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귀한 존재임을 밝힌 것으로 해석된다. 민주 국가 헌법에서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은 석가모니가 세상에 나올 때부터 강조한 가르침이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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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옛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 전시된 다여 스님의 '왕생화'. 홍철기 사진작가 촬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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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에는 공간에 따라 각기 다른 지화가 전시돼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기린다. 박종철 열사가 희생된 509호 조사실 입구엔 '왕생화'가 있다. 다여 스님은 "가장 가슴 아픈 분으로, 청춘에 의지와 무관하게 삶을 강탈당한 분"이라면서 "(민주화 열사들의) 발자취를 배우면서도 이 땅에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도록 빌겠다"고 말했다.

    박종철 열사와 그 유족은 독실한 불자로 알려져 있다. 1987년 3월 3일 부산 사리암에서 진행된 박 열사의 49재는 한국의 민주 헌정 수립의 계기인 6월 항쟁의 기폭제였다. 박 열사의 친형 박종부 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는 "사리암에서 49재를 지낼 때 양산 통도사에 계시던 월하 스님께서 종철에게 '춘삼(春三)'이란 법명을 지어 주셨다"며 "이 땅에 민주의 봄, 민족의 봄, 민중의 봄의 마중물이 된다는 뜻이었다"고 인연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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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남영동 대공분실 3층 반장실은 건물 중 유일하게 큰 창이 난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 기획 의도에 따라 창을 가리고, 반성과 악의 소멸을 상징하는 지화를 설치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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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걸어 올라갔을 나선형 계단엔 인내와 기다림을 뜻하는 매화가 전시돼 있다. 1987년 민주화 운동을 다룬 4층 전시실에 세운 '법신화'는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뜻을, '만다라화'엔 새로운 사회적 질서의 조화를 기리는 의미를 담았다.

    특히 눈길을 잡는 전시 공간은 '가해자의 공간'으로 볼 수 있는 3층 반장실이다. 대공분실 건물에서 유일하게 밖으로 난 큰 창이 있는 휴식 공간인데, 창문을 가사 문양으로 가리고 반성과 악을 쫓아냄을 의미하는 꽃들을 전시했다. 다여 스님은 "불교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불이(不二)사상을 담고 있다"면서 "남을 괴롭혔다면 나도 괴로움을 당할 수 있음을 깨닫기를 바란다"고 했다.

    "지화도 땅설법도 삶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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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여 스님은 옛 남영동 대공분실 1층 피해자가 드나든 문에는 접중화(오른쪽)를, 나선형 계단에는 매화(왼쪽)를 설치해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가정으로 무사 귀환과 마음의 평안을 바라는 뜻을 담았다. 홍철기 사진작가 촬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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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여 스님이 옛 대공분실 4층 '1987년' 전시장에 설치한 만다라화. 홍철기 사진작가 촬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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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화는 생화를 사용하지 않는 불교에서 의례 때 쓰기 위해 종이로 만드는 장식물이다. 한국전쟁과 분단, 근대화 과정에서 지화의 쓰임이 줄면서 전승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현재 전승되는 지화는 10여 종. 다여 스님은 100여 종의 지화 만드는 법을 전수받았다.

    이번 전시에도 △중생의 청정심을 뜻하는 '금강법계대일여래화' △해탈을 상징하는 '약사여래칠불공덕화' △언어를 초월한 진리를 뜻하는 '묘법연금광명대바라화'처럼 불교의 정신적 의미가 깊은 희귀 지화가 재현됐다.

    지화를 만드는 과정조차 불교 사상의 실천이다. '살잡기'로 불리는 전통 주름 접기 기법은 한지 한 장을 자르지 않고 남김없이 접어서 모양을 내게 돼 있다. 김현진 감독은 "환경적으로도 지속 가능한 전통 공예의 지혜가 담겨 있고, 불교에서도 원형 그대로를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불법의 정신성을 구현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태고종 총무원장 상진 스님은 "지화 한 장 한 장을 정성을 다해 접고 색을 입히는 과정은 수행자의 참선과도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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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일 서울 용산구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하는 다여 스님(왼쪽)과 김현진 전시감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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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여 스님이 지화와 함께 전수받은 땅설법은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불교 교리를 강연하는 모든 기법이다. 땅설법은 지화 외에도 종이로 만든 탈, 인형 등을 사용해 신도들과 함께 마당극을 펼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과 소통한다. 다여 스님은 신라의 방식인 '남조'와 고구려에서 발해로 이어진 '북조'를 모두 배운 무명(無明) 스님으로부터 땅설법을 전수받았는데, 현재 이를 재현하는 이가 한국은 물론 중국·일본에도 없다. 국가유산청은 땅설법을 '미래 무형문화유산 발굴 육성 사업' 대상으로 선정해 지원한다.

    다여 스님은 땅설법도 지화도 "결국 삶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화를 만드는 것도 설법을 하는 것도 실제 불교 의례에서 쓰임새를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희귀 불교 지화를 민주화운동과 연결시키는 전시에 나선 것 또한, 지화가 실제 어떤 의미인지 보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전시니 예술가니 하지만, 승려로서 지금까지 하던 의례와 기도를 위한 꽃을 기념관에 맞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인현우 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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