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주께로(Zucchero) 신정원 셰프
편집자주
음식을 만드는 건 결국 사람, 셰프죠. 신문기자 출신이자 식당 '어라우즈'를 운영하는 장준우 셰프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 너머에서 묵묵히 요리 철학을 지키고 있는 셰프들을 만납니다. 한국 미식계의 최신 이슈와 셰프들의 특별 레시피를 격주로 연재합니다.서울 중구의 이탈리아 음식점 주께로의 피치 카치오 에 페페(Pici cacio e pepe). 지리산 토종 우리밀로 만든 피치 생면에 페코리노 치즈와 후추로만 맛을 낸 이탈리아식 파스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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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을 할 때 우리가 기대하는 건 두 가지다. 하나는 특별함이다. 평소 접하지 못한 맛과 따라 하기 힘든 화려함으로 색다른 경험을 만끽하는 것이다. 특별함 맞은편에는 편안함이 있다. '집밥' 키워드로 대표되는 안온한 음식들이다. 외식을 한다는 건 두 경험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울 중구 약수동 골목에 자리 잡은 '주께로'는 이탈리아식 집밥, 쿠치나 카살링가(Cucina Casalinga)를 선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가 파스타 한 접시를 맛보면 금세 이곳이 추구하는 바를 알아차리게 된다. 편안한 음식도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맛으로 보여주는 신정원(37) '주께로(Zucchero)' 셰프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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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음식 배우러 학교 대신 팜스테이
신정원 셰프가 주방에서 파스타 위에 치즈를 갈아 올리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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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문학 전공자인 그는 2008년 독일 본대학교 교환학생 시절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가 '간 김에 좀 오래 머물자'는 생각으로 농장 체험 프로그램인 우프(WWOOF)를 신청했다. 유기농 농장에서 일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피렌체 근교에 있는 올리브 농장에서 일하다 갓 짠 올리브오일을 듬뿍 뿌린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새참으로 먹었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어요. 그 자체로 너무 맛있어서 신선한 충격이었죠."
단순함이 주는 강렬함에 매료된 그는 독문학 교수의 꿈을 뒤로하고 요리의 길을 택했다. 귀국 후 통역 일을 하며 자금을 모아 틈만 나면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요리 학교가 아니었다.
"화려한 레스토랑 음식보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해 먹는 진짜 밥상이 궁금했어요. 관광객용 메뉴판에는 없는 그들의 부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걸 알고 싶었죠."
주께로의 탈리아텔레 알 라구(Tagliatelle al ragu). 지리산 토종 우리밀, 제주 애월아빠들 무항생제 달걀로 만든 탈리아텔레 생면에 라구 소스가 어우러져 깊은 풍미를 자아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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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셰프는 이탈리아 식문화를 깊이 이해하겠단 마음으로 이탈리아 북부부터 시칠리아까지 6개월가량 전역을 돌며 '팜스테이(Farm Stay)'를 자청했다. 시에나에서 팜스테이를 하다 평생 은인이 된 이탈리아 노부부를 만났다. 부모님 또래였던 그들은 낯선 동양인 아가씨를 친딸처럼 대해줬다.
이탈리아 식문화에서 강조하는 재료 본연의 맛은 그에게 사실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일찍이 식당을 운영하셨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는 냉장고에 별다른 재료가 없어도 뚝딱 한 상을 차려내곤 하셨어요. 어릴 때 심부름을 갈 때면 '두부는 누구네 집, 부추는 대성이네 집'이라 하시면서 재료마다 가장 좋은 가게를 콕 집어주셨죠. 좋은 재료가 곧 요리의 전부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던 것 같아요."
신정원 셰프가 주방에서 우동 면처럼 굵은 피치 파스타를 만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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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뛰게 하는 건 "편안한 요리"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 문화를 몸소 겪은 그는 본격적으로 주방 세계를 경험하고자 베네치아의 미슐랭 레스토랑 '로칼레'와 로마의 '이탈리' 등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그러면서 '사무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칼질에 매진하는 등 한때는 정교한 파인 다이닝의 세계에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편안한 요리가 가슴을 뛰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온 뒤 그의 요리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도 역시 농장에서의 경험이었다. 이탈리아로 돌아가 아그리투리스모(Agriturismo·농가 민박)를 운영하려던 계획이 팬데믹으로 무산되자 제주로 향했다. 지역 생산자들과 교류하며 제주 식재료와 전통 음식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4년을 보냈다.
주께로의 벽면에 각 재료의 원산지와 생산자 이름이 적혀 있다. 신정원 셰프는 손님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잠깐이라도 '이게 어디서 왔지'라고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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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명 주께로는 이탈리아어로 설탕을 뜻한다. 신정원 셰프가 이탈리아 바에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설탕 봉지를 수집하던 취미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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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함의 힘... 친구가 밥 해주는 느낌 들었으면"
제주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올해 3월 '주께로'를 오픈했다. 이탈리아어로 설탕을 뜻하는 주께로는 이탈리아 바에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설탕 봉지를 수집하던 취미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주께로의 메뉴는 다분히 이탈리아적이다. 재료가 가득 담긴 '한국식 파스타'와는 달리, 면과 재료 한두 가지로 만든 심플한 요리란 의미다. 이탈리아에서는 실제로 파스타에 많은 재료를 넣지 않는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맛보다는 면의 식감과 재료의 맛을 선명하게 살리는 게 이탈리아 가정식 파스타의 핵심이다.
"어떤 분들은 너무 간단한 거 아니냐고 그러시고, 일단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로 시작해 돈부터 벌고 나중에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만류하기도 했죠. 하지만 파스타 하나에도 제가 경험해 온, 진짜 이탈리아 가정에서 해먹는 편안한 요리를 재현하고 싶었어요. 제가 느낀 심플함의 힘을 누군가도 느꼈으면 해요."
주께로 특제 토마토 소스를 넣어 매콤하게 만든 아라비아따 파스타(Spashetti all arabbia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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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원 셰프는 음식을 생산자와 요리사, 손님, 재료, 기억들이 겹쳐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장으로 설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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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디서 왔지?' 경로 생각하는 음식 만들고파
신 셰프에게 주께로는 종착지가 아니라 과정이자 실험이다. 단순히 밥을 먹고 헤어지는 식당이 아니라 낯선 이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온기를 나누는 장이 되기를 꿈꾼다. 내가 먹는 음식이 누구의 손에서 어디서 왔으며 누가 만들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 앞에 놓인 한 접시는 더 이상 음식이 아니라 관계가 된다.
"예술이론 중에 '관계의 미학'이란 말이 있어요. 예술 작품 자체보다 그것을 둘러싼 인간 관계와 사회적 맥락이 중요하다는 건데 음식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생산자와 요리사, 손님, 재료, 기억들이 겹쳐서 하나의 장이 만들어지는 게 저는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먹는 동안 잠깐이라도 손님들의 머릿속에 '이게 어디서 왔지'라는 생각이 스치면 좋겠어요."
그는 언젠가 한국 시골 마을에 자신만의 농가 민박을 짓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직접 기른 작물로 아침을 차리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흙의 가치와 음식으로 연결되는 관계의 의미를 전하며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이 작은 식당은 그 꿈을 위한 긴 여정의 출발점이다.
이탈리아식 '홍합 콩 수프(Zuppa di Mare e Monti)'. 콩과 홍합 이외에도 버섯과 새우등 다양한 재료를 넣어 끓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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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장준우 어라우즈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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