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지 속 '은행원 도장', 현금 출처 추적 유용 단서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서 등장한 '5000만원 관봉'
文 정부 검찰 수사로 "국정원 특수활동비" 결론
건진법사 뭉칫돈 출처는… "중요한 건 띠지 정보"
탈옥수 신창원이 검거된 1999년 7월 16일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에서 발견된 현금 다발. 당시 총 1억8,130만 원에 달하는 1만원권 지폐 뭉치가 가방 3개에서 발견됐다. 경찰은 1만 원짜리 지폐를 100장씩 묶은 띠지 등을 토대로 추가 수사를 벌여 절도 피해자 김모씨를 찾아냈다.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강도를 당한 김씨는 신창원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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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다발에는 복잡한 스토리가 따라붙는다. 가만히 두면 화폐 가치가 계속 하락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금 뭉치를 '개인 금고'에 고이 모아둔 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사연'을 엿볼 수 있는 정보를 품고 있는 게 바로 돈다발의 '띠지'다. 시중은행은 창구에서 현금을 인출해 줄 때 지폐 100장을 하나의 띠지로 묶는다. 은행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통상 띠지에는 현금을 내준 텔러(은행원)의 막도장이 찍혀 있다. 은행 지점이나 출금 날짜 등 정보가 담기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수사기관은 '돈다발 관련 범죄' 수사 시 띠지를 먼저 분석 대상으로 삼는다. 압수수색에서 뭉칫돈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소유자가 출처 등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하더라도, 은행 지점·출금일 등 '띠지 정보'를 추적하다 보면 실타래가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돈다발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띠지는 매우 유용한 '물증'이라는 얘기다.
한나라당 돈봉투 사건, '스모킹 건'은 띠지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을 폭로한 고승덕 의원이 2012년 1월 8일 참고인 조사를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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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지는 이명박(MB) 정부 시절인 13년 전, 정국을 흔들었던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 수사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2008년 7월 3일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지지율 29.7%를 얻어 정몽준 후보(25.6%)를 누르고 당대표에 선출됐다.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2012년 초, 고승덕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당대표 선거 당시 박희태 국회의장 측 인사로부터 지지 권유와 함께 현금 300만 원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초선 의원의 양심선언이었지만 '나도 돈봉투를 받았다'는 다른 의원의 추가 고백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여당 출신 현직 국회의장, 돈봉투 전달의 '컨트롤타워'로 지목된 김효재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등 MB정부 '실세'를 제대로 겨누기엔 단서가 부족해 보였다.
그나마 수사 동력을 제공한 건 '띠지'였다. 고 전 의원은 검찰 조사에서 "현금이 하나은행 띠지에 묶여 있었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박 전 의장이 전당대회를 엿새 앞둔 2008년 6월 27일 하나은행에 마이너스 계좌를 개설하고, 다음 달 1, 2일 직원을 통해 현금 인출을 한 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관련자 조사를 이어간 뒤 박 전 의장과 김 전 수석, 조정만 당시 국회의장 정책수석비서관 등 3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박 전 의장은 결국 1심 재판에서 "정치권의 오래된 관행이었다"며 혐의 일체를 인정했고, 이 사건으로 정계를 사실상 은퇴했다.
다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있었던 탓인지, 당시 MB정권과 여당을 향한 검찰의 수사 의지는 부족해 보이기만 했다. 검찰은 돈봉투 살포 범위나 전체 액수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고, 이미 모두가 알고 있던 '고승덕 300만 원' 부분만 처리했다. '정권 눈치 보기 수사'라는 비판이 쏟아졌던 이유다. 하지만 금품 수수자의 자백, 공여자의 발뺌만 계속되던 상황에서 '돈다발 띠지'가 꽉 막힌 수사의 돌파구가 됐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갚으려 모아둔 돈" 피의자 변명 탄핵 역할
지난해 7월 울산의 한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검은 봉지에 담긴 채 발견돼 화제를 모았던 5만 원권 돈다발. 경찰은 돈다발 띠지에 찍힌 은행 입고 날짜와 담당자 직인을 확보해 인출 은행을 파악한 뒤, 폐쇄회로(CC)TV 분석 등을 거쳐 80대 남성을 주인으로 특정해 이 돈을 돌려줬다. 울산경찰서 제공 |
띠지는 현금 출처에 관한 사건 관계자의 변명을 탄핵하는 근거로도 사용된다. 2018년 '송도근 전 경남 사천시장 금품 수수 사건'이 대표적이다. 송 전 시장의 배우자 A씨는 그해 1월 9일 경찰이 남편의 집무실을 압수수색하자, 평소 사무를 도와줬던 B씨에게 "당장 우리 집으로 가서 현금 5,000만 원을 치우라"고 지시(증거은닉교사 혐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돈다발을 빼돌리다가 수사선상에 오른 B씨는 "갚아야 할 데가 있어 보관하던 돈"이라며 시치미를 뗐다. 돈의 출처에 대해선 "갖고 있던 외환을 일본에서 환전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2014년 6월 27일 전남 순천시 소재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별장에서 찾아낸 현금 8억3,000만 원과 미화 16만 달러. 검찰은 유 전 회장이 세월호 사건 수사를 피하기 위해 마련한 도피 자금이라고 봤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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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가 평소 거래하지 않는 은행의 띠지는 '유죄의 심증'을 형성하기도 한다. 서울 노원구 청원고 교장 윤모씨는 정교사 채용 전환 대가 등으로 수십억 원을 챙긴 혐의(배임수재)로 2012년 7월 재판에 넘겨졌다. 돈을 준 사람과 돈을 받은 사람 모두 혐의를 부인하던 가운데, 윤씨 개인 금고에서 현금 다발과 함께 발견된 띠지 11장은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됐다. 해당 띠지는 C은행 동대문상가점이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곳은 윤씨가 거래한 적도 없는 은행이었다. 검찰은 정교사 채용을 청탁한 기간제 교사 학부모의 주거래 은행이 C은행이었고, 그들이 2010년 1월 해당 은행에서 현금 1억 원 등을 인출한 사실을 확인했다.
법원은 윤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C은행 등과 금융거래를 한 사실이 전혀 없으면서도, 해당 띠지가 묶인 현금을 금고에 보관하게 된 경위에 관해 특별한 설명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결문에 적시했다.
한은 띠지 '관봉', 靑 고위직 연루 단서 되기도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폭로한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에게 2011년 4월 류충렬 전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이 전달한 5,000만 원 돈다발. 한국은행 '관봉'으로 묶인 5만 원권 신권이며, 100장씩 묶인 돈다발 10뭉치로 구성돼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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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다발을 묶은 띠지 중에서도 한국은행이나 조폐공사가 직접 묶은 띠지를 '관봉(官封)'이라고 부른다. 관봉권은 한국은행이 시중은행 등 금융기관에 화폐를 보낼 때 주로 사용한다. 시중은행 띠지와 마찬가지로 지폐 100장 묶음으로 띠지를 두르고, 이걸 다시 10개씩 묶어 비닐 포장 후 스티커를 붙인다.
검찰 수사에서 관봉권이 처음 주목을 받았던 건 '이명박 정부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에서다. 장진수 전 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은 검찰 수사 약 2년 후인 2012년 3월, "류충렬 전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이 입막음 대가로 5,000만 원을 줬다"고 폭로했다. 류 전 관리관은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돈"이라고 해명했지만, 현금 출처를 둘러싼 의혹이 제기됐다. 해당 돈다발은 한국은행 '관봉권'이었고, 띠지로도 묶여 있었다. 지폐의 일련번호가 순서대로 정리돼 있는, 시중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형태의 돈다발이었던 것이다. '청와대가 특수활동비를 활용해 장 전 주무관 입을 막으려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장진수 전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이 받은 관봉권의 확인서. '한국은행 오만 원권'이라는 품명과 기호, 지폐 수량, 포장번호 등이 기록돼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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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ankookilbo.com/News/Read/201204021799877734)
검찰은 2012년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 2차 수사에서 이 관봉권의 실체를 밝히진 못했다. 류 전 관리관은 "고인이 된 장인에게서 받은 돈"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을 폈다. 검찰은 1차 수사 이전인 2009년 10월 한국은행에 입고됐던 돈이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 출고 날짜와 출고된 시중은행 등을 파악하는 데엔 실패했다.
관봉권의 실체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인 2018년 '국가정보원 특활비 사건' 수사를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났다. 검찰은 국정원 특활비 용처 조사 과정에서 일부가 관봉 형태로 2011년 김진모 당시 청와대 민정2비서관에게 흘러간 정황을 포착했다. 해당 관봉권은 김 전 비서관이 국정원에 "불법 사찰 사건으로 기소된 공무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요구해 받은 뒤, 장석명 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과 류 전 관리관을 거쳐 장 전 주무관에게 전달된 것으로 밝혀졌다.
건진법사 '관봉권 띠지' 분실, 검찰의 증거 폐기?
'건진법사' 전성배씨의 자택에서 압수된 5,000만 원 관봉권. 독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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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봉권과 띠지가 최근 다시 '키워드'로 떠오르게 된 계기는 윤석열·김건희 부부가 연루된 '건진법사 사건'이다. 서울남부지검은 지난해 12월 '건진법사'로 불리는 무속인 전성배씨 자택에서 1억6,500만 원의 현금 다발을 압수했는데, 이 중 5,000만 원이 한국은행 관봉권이었다. 스티커에는 검수 기계 식별 번호와 처리 일시, 담당 부서, 담당자 코드 등 '중요 정보'가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수사팀은 해당 관봉권의 띠지와 스티커, 다른 현금 다발의 시중은행 띠지 실물 등을 모조리 분실했다. "경력이 짧은 압수계 직원이 현금만 압수 대상물이라고 판단하고, 보관 전 현금을 세는 과정에서 띠지를 버렸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파악해 대검에 보고했다"는 게 수사팀 입장이다. 당시 검찰이 수사 중이던 전씨의 혐의는 2018년 범죄사실이었던 반면, 관봉권은 4년 이후인 2022년 5월에 봉인된 것이어서, 당장 '분실 책임자'에 대한 감찰보다는 본안 수사에 집중했다는 취지다.
관봉권이 사용권(구권)으로 구성돼, 특활비일 가능성이 적었던 점도 감찰 연기 이유로 풀이된다. 검찰 안팎의 설명을 종합하면, 그동안 청와대 특활비는 거의 대부분 신권 관봉권으로 지급됐다고 한다. 앞서 국정원 특활비로 결론이 난 '민간인 불법 사찰 사건'의 관봉권도 신권이었다. 간혹 시중은행 창구에서 거액을 인출할 때 한국은행 '관봉' 형태 그대로 내주기도 하는데, 검찰은 이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뒀던 것으로 보인다.
'건진법사'로 불리는 무속인 전성배씨가 21일 서울 종로구에 마련된 민중기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향하고 있다. 김건희 여사와의 친분을 이용해 각종 청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전씨는 이날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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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권에서는 검찰의 '봐주기 수사'를 의심한다. 지난해 말 검찰이 윤석열 당시 대통령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졌던 전씨의 혐의를 덮기 위해 중요 증거를 일부러 폐기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수사팀은 올해 4월 띠지 분실 사실을 파악하고도 감찰 등을 진행하지 않았다. 대검 감찰부는 최근에서야 정성호 법무부 장관 지시로 감찰에 파악한 뒤, 정식 수사로 전환했다.
법조계에서도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사건인 만큼, 검찰이 더 신중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다만 수사와 관련해선 관봉권 스티커·띠지 실물 분실이 큰 걸림돌이 되진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해당 관봉권 스티커 내용은 검찰이 이미 촬영한 뒤 수사보고서를 생성했고, 이에 근거해 추적 수사를 진행하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관봉권 수사 경험이 있는 특수통 출신 변호사는 "중요한 것은 스티커나 띠지 등 실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담겨 있는 정보"라고 짚었다. 이어 "이미 관련 정보를 취득해 수사하고 있다면, 설령 띠지 자체가 폐기됐어도 증거 능력이나 유죄 입증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띠지 관련 수사 경험이 있는 검사장 출신 변호사도 "띠지는 수사망을 좁히고 사건 관계자들을 추궁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단서일 뿐, 금품 수수 사건의 핵심 증거는 결국 사건 관계자들의 진술"이라고 강조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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