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 공연…바우만 근대 이론에 기반한 연출과 무대
제22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 공연 '일 트로바토레' |
(대구=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제22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26일 오후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개막작으로 선보인 작품은 주세페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1853)였다. 사회의 하층민인 집시 여성이 억울하게 화형당한 어머니의 복수를 통해 최고의 귀족 가문에 멸문지화를 안긴다는 내용이다.
연출가 이회수는 폴란드 출신인 영국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5∼2017)의 '고체 근대-액체 근대 이론'(solid modernity-liquid modernity theory)을 틀로 삼아 연출 방향과 무대디자인을 결정했다. 이 이론은 안정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사회 구조 및 확고한 규범과 제도를 토대로 사회구성원에게 동질성과 획일성을 강요해온 '고체 근대' 사회가 20세기 후반의 급속한 사회변화에 따라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액체 근대' 사회로 이행하고 있음을 주장한 이론이다. 이는 집단적 정체성에서 개인적 선택으로의 이동을 뜻한다.
제22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 공연 '일 트로바토레' |
바우만의 이론을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연출에 적용한 것은 흥미로운 시도였다. 루나 백작 가문의 명예와 혈통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사회질서, 연인 만리코가 죽은 줄 알고 수녀원으로 떠난 귀족 처녀 레오노라 등에서 드러나는 '고체 사회'가 만리코의 정체성 혼란(내가 집시의 아들인가, 아닌가), 아주체나의 이중적인 모성(아들에 대한 헌신인가, 처음부터 아들을 복수의 도구로 키운 것인가), 서로가 핏줄임을 모르는 형제 관계(루나와 만리코)와 같은 '액체 사회'로 이행한다고 볼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이처럼 사랑과 증오, 복수와 용서가 뒤섞인 감정의 혼재 속에서 고통당하며 비극적 결말로 이끌려간다.
제22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 공연 '일 트로바토레' |
이 이론은 무대디자인에도 적용돼, 견고한 콘크리트 건축물에는 균열이 일어나고 각 부분이 점차 허물어져 간다. 작품 내용의 특성상 '일 트로바토레'의 무대는 대체로 어둡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김현정의 무대디자인과 문길환의 조명디자인은 상생하고 상호조응 하며 해체의 미학을 부각했다. 연출가 이회수는 장면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무대를 활용했다. 특히 2막에서 갑옷 입은 병사들과 흰옷의 수녀들이 계단 위에 도열한 수도원 장면, 감옥의 철창이 내려오며 밖과 안이 바뀌는 4막의 감옥 장면은 강렬한 효과를 가져왔다.
제22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 공연 '일 트로바토레' |
디오오케스트라(대구국제오페라오케스트라)와 대구오페라콰이어를 지휘한 아드리앵 페뤼숑은 과거에 라디오프랑스 및 서울시향의 수석 팀파니스트로 활약했고 현재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여서 국내 청중에게도 꽤 익숙하다. 유럽에서 다수의 오페라를 지휘해온 그는 이날 공연에서 뛰어난 극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특히 타악에서 남다른 효과를 끌어냈고 무대 위 성악가들과의 호흡도 만족스러웠다.
반란군을 이끄는 만리코 역의 테너 국윤종은 2년 전 국립오페라단에서 이 역을 노래했을 때보다 더 여유 있게 역할을 소화했고, 고난도의 아리아 '저 타오르는 불길을 보라'의 고음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관객의 뜨거운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만리코의 연인 레오노레 역의 소프라노 이명주는 고음역, 저음역에서 모두 흔들림 없이 안정적이었고 오페라하우스를 풍성하게 채우는 성량과 힘이 넘치는 고음으로 객석의 흥분을 고조시켰다. 레오노라를 두고 만리코와 대결하는 연적 루나 백작 역의 이동환은 배역에 정확히 어울리는 음역과 음색으로 아리아 '그 미소의 찬란한 광채'에 담긴 기품과 열정을 구현했다.
제22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 공연 '일 트로바토레' |
주역에서 조역들까지 모든 배역이 적역이었지만 이날 특히 남다른 인기를 끈 인물은 메조소프라노 산야 아나스타시아의 아주체나 역이었다. 분노의 에너지와 집중력으로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배역이지만 메조소프라노의 성역 특성상 시원하게 트인 소리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데, 아나스타시아는 압도적인 파워와 설득력으로 관객을 몰입시켰다. 여린 피아노 음에서도 선명하게 귀에 꽂히는 목소리는 감탄할 만했다. 페란도 역의 베이스 김동호 역시 정교하고 세련된 가창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각 배역 최고의 성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였음에도 연출가는 인물 간 관계의 진정성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성악적으로 어려운 작품임을 감안한다 해도 무대 위 움직임 또한 지나치게 부족했다. 대본 번역에서 눈에 띄는 오류들이 있었던 것도 더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제22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 개막 공연 '일 트로바토레' |
rosina0314@naver.com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