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어떻게 중국에 포획됐나…신간 '애플 인 차이나'
팀 쿡과 스티브 잡스 |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나라 전체가 휘청인 이른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타격을 입고 있던 LG는 애플의 수주를 따내는 데 성공했다. 부사장 팀 쿡을 비롯한 애플의 주요 경영진이 경북 구미까지 찾아와 아이맥 생산을 독려했다.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복귀한 스티브 잡스의 성공 여부는 신제품 아이맥에 달려 있었고, LG는 협력업체로서 보기 좋게 이를 수행했다. 1998년 아이맥이 출시되자, 수요가 폭발하면서 애플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상승세를 탄 애플의 파트너 LG도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며 웨일스, 멕시코 등에 대규모 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웨일스 공장은 하드디스크 도난, 출하 속도 저하, 조립 중 화재, 반도체 가격 하락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며 위기를 맞았고, 멕시코 공장도 문화 차이로 성과가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관계자들이 금융지원 자료를 검토하는 모습. |
업황이 좋지 않았고, 웨일스 등의 공급망 문제도 있었지만 LG는 애플과 밀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아이맥의 단독 제조업체로서 애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LG는 대량생산뿐 아니라 제품 설계 과정에도 깊이 간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LG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대만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홍하이 정밀공업, 즉 폭스콘의 움직임이었다. 폭스콘 CEO 궈타이밍(郭台銘)은 팀 쿡에게 전화해 말했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폭스콘 창업자 궈타이밍 |
궈타이밍의 제안은 '제살깎아먹기'에 가까웠다. 제조공정 장비와 도구 등을 마련하는 데 드는 초기 비용을 폭스콘이 감당하고, LG보다 한대당 40달러 저렴한 가격으로 아이맥을 생산하겠다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LG만 못했지만, 폭스콘의 기술력이 나쁘지 않은 데다가 전폭적인 투자도 감행한다고 하니, 애플로선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애플은 궈타이밍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홍하이 정밀공업의 영어 명칭이 왜 폭스콘(Fox-conn)인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었다. 중국 선전의 트레일러 같은 사무실에서 플라스틱 테이블을 책상 삼아 근무하며 사치와는 담을 쌓고 산 '개천용'(개천에서 난 용) 궈타이밍은 늙은 '여우'(Fox)처럼 영민하고, 노련했다. 그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애플의 파트너가 된다는 건 애플의 기술력을 배우는 것을 의미했다. 그의 목표는 "수익이 아니라 배움"이었다.
"애플 엔지니어들이 대만이나 중국의 현지 인력들과 함께 일하며 제공하는 배움의 기회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폭스콘의 목표는 이러한 가르침을 흡수해 갈고닦은 기술을 더 수익성 높은 다른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궈타이밍)
폭스콘 선전 공장. 2010년 5월 풍경 |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기자인 패트릭 매기가 쓴 '애플 인 차이나'(인플루엔셜)에 나오는 내용이다. 책은 애플이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함께 중국에 점차 예속돼 가는 상황을 그린 논픽션이다. 아울러 애플과 테슬라 등 미국 빅테크기업(거대 기술기업)의 도움을 받아 기술 굴기를 이뤄가는 중국과 자본 논리에 입각한 '오프쇼어링'(생산기지 국외 이전) 전략 탓에 제조업 공동화 상태에 빠진 미국의 뼈아픈 판단 미스를 다룬 책이기도 하다.
책에 따르면 1997년 잡스가 복귀하기 직전, 애플은 오프쇼어링 전략을 채택했다. 초기에는 한국과 대만으로 생산거점을 옮겼고, 이어 멕시코, 웨일스, 체코, 중국으로 확대했다. 이중 값싸고 유연하며 근면한 노동력을 대규모로 보유한 중국이 핵심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1999년까지만 해도 애플 제품은 중국에서 단 한 개도 생산되지 않았으나 2009년이 되자 거의 모든 제품이 생산됐다. 애플은 50개국에서 1천500개가 넘는 공급업체와 협력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거의 모든 길이 중국으로 통했다. 전 세계 생산의 90%가 중국에서 이뤄지고, 베트남·인도에 있는 생산시설도 중국 공급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초과수요로 2011년 베이징 싼리툰의 애플스토어에서 발생한 유혈사태. |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중산층을 보유한 중국이란 시장을 놓칠 수 없었다는 점, 생산가격이 저렴한 데다 제조 능력이 탁월했다는 점 등 애플이 중국을 신경 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즉 애플 입장에서 중국은 놓칠 수 없는 시장이자, 공장이었다. 돈의 맛은 강력했고, 애플은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애플은 중국 공급망 업체를 강도 높게 훈련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캘텍), 스탠퍼드대를 나온 애플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중국에 파견됐다. 엔지니어들이 하루 최대 18시간씩 일하는 애플의 문화는 곧 중국 공장에 착근했다. 애플과 끈끈한 관계를 맺은 공산당 지도부가 이 같은 노동착취를 묵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직 애플 관계자는 애플이 "새로운 기술, 새로운 연구소, 새로운 설비 등 무엇이든 찾아내면 그 기술을 중국에 이전하려 했고, 기존 기술로는 만들 수 없던 것을 중국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아이폰 4 |
책은 자본의 논리에 포획된 미국 기업이 미·중 간의 패권 경쟁에서 자국에 어떤 악영향을 미쳤는지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조망한다. 애플이 뿌려놓은 IT 씨앗은 대만을 거쳐 중국 공급망 업체들로 흘러 들어갔고, 이렇게 사방으로 뻗어나간 "붉은 공급망" 속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인재들이 화웨이, 샤오미, BYD 등 중국 빅테크기업들로 자리를 옮겨갔다.
저자는 "중국은 수십 년 동안 첨단산업, 과학 연구, 경제력에서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애썼다. 종종 스파이 행위, 노골적인 기술 절도, 강압적인 수단을 썼다"며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빅테크기업이 스스로 프로메테우스의 역할을 자처하며, 중국에 불을 선물하듯 기술과 지식을 전해주겠다고 나섰다"고 지적했다.
아이폰 에어(왼쪽)와 아이폰 17 PRO |
애플과 중국의 밀월 관계를 다룬 이 책은 미국이 어떻게 제조업 패권을 중국에 뺏겼느냐는 구조에 관한 이야기에 천착한다. 그 과정에서 인물을 소개하는 열전 양식의 스토리텔링이 흥미를 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리는 날카로운 눈을 가진 인물들의 이야기가 저자의 격정적인 문체에 실려 책에 담겼다. 언제 들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잡스의 귀환과 아이폰 발명 이야기, 칸트처럼 정확하고, 믿을 수 없이 부지런한 모범생 팀 쿡의 경이적인 자기관리, 맨손으로 시작해 애플의 공급망을 장악한 궈타이밍의 노림수, TSMC를 일군 역전의 용장 장중머우의 집념, 수천년간 제국을 유지했던 중국 관료들의 노하우를 권력투쟁 과정에서 자연스레 습득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노회함, 그리고 강태공처럼 "때를 기다린" 시진핑 주석의 이야기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인플루엔셜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
이준걸 옮김. 640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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